밤새 내린 비로 인해 모든 것이 축축하다. 일찍 잠든 탓에 5시가 되어 잠이 깨고, 침낭을 끌어당기며 여분의 졸음을 떨쳐내려 노력한다.
아침 기온 1도, 침낭 밖을 벗어나면 금세 냉기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따듯한 커피가 먹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으름, 버너를 켜는 것조차 귀찮아 커피도, 아침도 건너뛴다.
이틀 연속으로 라이딩을 일찍 끝낸 탓에 니즈니 노보고로드까지 60km의 거리가 남았다.
"일찍 도착해서 쉬고 싶다. 따듯한 샤워와 휴식이 필요해."
7시 반, 비에 젖은 텐트를 분리하고 짐들을 챙겨 출발을 서두른다.
고개를 넘는 업힐로 시작되는 라이딩, 오늘의 날씨도 회색빛 짙은 구름이다.
젖은 신발과 마르지 않은 양말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진다.
계속되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고개를 넘는 동안 보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첼니에는 밤사이 눈이 내린 모양이다.
"완전한 겨울의 시작이구나."
고개의 정상으로 회색빛 하늘의 구름이 완전히 내려앉고, 다시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비에 젖은 한기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고, 부킹닷컴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바로 출발한다.
편하게 쉬면서 여행 자료를 정리하고 싶은데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호텔비는 끔찍하게 비싸다.
긴 고갯길은 계속 이어진다. 페달링이 무겁다.
"배고프다."
두 시간을 넘게 달리고, 긴 언덕의 오르막을 억지스레 오른 후 거친 심호흡을 달래본다.
도로변에 작은 카페가 나타나고,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카페로 들어선다.
입구에 묘한 자판기가 놓여있다. 핸드폰을 충전하는 용도는 아닌 것 같고, 게임 같은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자판기다.
메밀밥과 수프 그리고 오랜만에 계란 후라이를 주문해 아침을 한다.
따듯한 카페에 계속 머물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왜 가도 가도 30km는 줄지가 않니?"
며칠째 계속되는 비구름인지 모르겠다. 힘든 라이딩의 연속, 매일처럼 한 달 동안 비가 내렸던 중국의 여행보다는 괜찮은 편이지만 겨울철의 비 내리는 날씨는 정말 힘들다.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위성 도시로 생각되는 크스토보를 지나친다.
작은 소도시지만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인다.
메인도로 M7과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들어가는 갈림길, 볼가강변을 따라 돌아가는 도로보다 메인 도로를 타고 이동한다.
차량의 소통이 조금 더 많겠지만 갓길이 확보되어 있는 메인 도로가 더 안전할 것 같다.
우파처럼 시내를 15km 정도 남기고 이케아 같은 유통 회사들의 거대한 창고형 매장들이 들어서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덕과 빗줄기,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모습이 나타날 것 같은데 좀처럼 그 모습을 보여주질 않는다.
시 외곽의 많은 자동차 대리점과 정비소 등을 지나치고서야 시내로 진입하는 교차로를 지난다.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는 오래된 트램의 철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트램과 전기버스 그리고 좁은 도로는 정신이 없다.
크렘린이 위치한 강변까지 계속되는 오르막이다.
"아, 이 도시의 지형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작고 오래된 건물들과 비좁은 도로에서 차량들과 뒤섞이며 길을 따라가던 끝에 작은 공원이 나온다.
공원의 입구에서 잠시 쉬고, 숙소와 크렘린의 위치를 확인한다.
공원을 지나면 차량의 통행이 없는 구시가지의 거리가 이어지는 것 같다.
첼랴빈스크의 오래된 거리처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이어지는 거리다.
예쁜 카페와 상점들,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고, 거리 곳곳에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을 구경하며 볼가강변의 크렘린을 향해서 이동한다.
거리의 끝에 크렘린의 붉은 성문이 보인다.
흰색의 카잔 크렘린과는 또 다른 느낌의 고성이다.
자전거를 끌고 성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가도 괜찮은가?"
아무런 제재도, 유료입장의 티켓 판매소도 없어 안쪽으로 들어가 성 내부의 지도를 확인한다.
카잔의 크렘린에 비해 별다른 건물은 없어 보이지만 넓은 정원이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일 것 같다.
성벽 안쪽으로 탱크와 같은 재래식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관광객과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춥다. 일단 숙소로 가자."
크렘린의 주변, 볼가강변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성벽을 따라간다.
성벽을 돌며 볼가강의 전경이 펼쳐지고, 강변 쪽의 성벽은 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오, 이런 지형이었어?"
꽤 높은 언덕 위에 쌓아올린 붉은 벽돌의 고성 니즈니 노브고로드 크렘린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진다.
"카잔 크렘린과 느낌이 다르다."
길을 되돌아가 성벽 밑으로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 볼가강변으로 내려간다.
지나왔던 구시가지와 다른 구시가지가 강변을 따라 들어서 있다.
교회들이 들어서 있고, 강변을 따라 많은 레스토랑들이 연이어진다.
"구경은 나중에."
예약해 두었던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고 바로 체크인을 한다. 다행히 깨끗하고 넓은 게스트 하우스다.
"여권을 주세요."
프런트의 여직원에게 여권을 주자 비자를 보여 달라고 하더니 여권 첫 장의 몽골 비자를 보더니 무언가를 계속 말한다.
"나 한국 사람이야. 몽골인 아니야."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미안하다며 체크인이 끝났다.
자전거는 건물 입구 안쪽에 묶어두고.
깨끗한 객실에 짐을 풀고.
젖은 텐트를 옷걸이에 걸어 말린다. 비릿한 물냄새와 흙냄새가 느껴진다.
"괜히 미안하네."
게스트 하우스의 실내가 넓어서 다행이다.
샤워를 하고 잠시 침대에 누으니 며칠 동안 비를 맞으며 달려온 몸에서 노곤함이 빠져나오는 것 같다.
"배고프네. 한식 레스토랑이 없나?"
몸이 힘들고, 허기가 심할수록 한식이 먹고 싶어진다. 구글맵으로 검색을 하니 크렘린 주변에 한식 레스토랑이 한 군데 검색된다.
"버스를 타고 갈까."
프런트의 직원에게 버스 요금을 물으니 종이에 30루블을 적어 보이며 싱긋 웃는다.
볼가강변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며 강변의 모습을 구경한다.
화려했던 카잔의 리카 카잔카의 모습과 달리 유람선 선착장을 제외하고 특별한 것이 없다.
"꽤 넓은 강이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두 정거장 거리의 한식 레스토랑 리스푸드를 찾아간다.
버스표를 왜 주는지 모르겠지만 버스비를 버스 안내원이 수동으로 받다 보니, 혹시나 착오가 있었을 때 확인을 하기 위해 버스표를 주는 것 같다.
도로변의 리스푸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비빔밥과 국수를 주문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식당에는 서너 테이블에 러시아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고, 이효리나 비의 오래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닭고기를 넣은 국수가 나오고, 내 입맛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러시아인이 즐기기에 괜찮을 것 같다.
순식간에 국수를 먹어치우고.
"오, 비빔밥 색깔 좋네."
초고추장을 듬뿍 넣고 쓱싹쓱싹 비벼 먹는다.
"역시 비빔밥은 고추장 맛이야."
밥을 먹는 동안 내 테이블 앞에서 어린 여자들이 화보 촬영을 하는지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며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댄다.
"뭔가 민망하지만 너의 예쁜 미모도 나의 식욕을 방해하지는 못해."
테이블의 앞과 옆을 오가며 한국어의 레온 사인을 배경으로 모델 포즈의 사진을 찍는 동안 비빔밥의 맛에 빠져든다.
"첼니의 친구들에게 맛 보여주고 싶네. 아쉽다."
고추장을 듬뿍 넣어 이글에게 먹이면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해진다.
국수는 모르겠지만 비빔밥은 제법 괜찮은 식당이다. 물론 비빔밥이라는 것이 야채와 김치만 넣고 비벼도 맛이 나는 음식이긴 하지만, 일단은 러시아의 쌀밥처럼 볶지 않은 밥이라 오랜만에 잘 먹었다.
"내일 한 번 더 먹을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크렘린을 둘러보며 걸어갈 생각이다. 여행 중 이색적인 도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지금의 시간이 꿈인가 싶기도 하다.
여행을 결심하기 전까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다른 나라의 도시를 혼자 걷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둘이면 좋을 텐데. 좋았을 텐데."
잠시 맑아진 하늘, 크렘린으로 걸어간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성문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냉장고 자석을 하나 산다.
여행 중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수도 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나라마다 하나씩 구매를 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여러 공화국들의 특색이 달라서 자꾸 욕심이 난다.
"이러다 패니어에 온통 냉장고 자석뿐이겠어."
카잔의 크렘린은 화려한 정교회와 모스크가 들어서 있어 카잔이라는 도시의 생활 중심지처럼 편안함이 느껴진다면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크렘린은 적막한 요새처럼 느껴진다.
"단지 흰색과 붉은색의 무게감 때문인가?"
작고 아담한 교회의 모습이 예쁘다.
높은 언덕 위의 더 높은 성곽에서 바라보는 볼가강의 풍경은 시원하다. 넓게 내려다보이는 볼가강의 자연스러운 풍경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시간을 보낸다.
노을이 져가는 밝은 하늘의 풍경과 검은 비를 흩날리며 빠르게 흘러가는 회색빛의 구름들의 풍경이 뒤섞이며 황홀한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높은 언덕을 내려와 숙소로 향한다.
숙소 편의 성곽 입구에는 멋진 조각석이 놓여있다. 성을 지키던 기사들의 모습을 조각한 것인지 비장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성문을 나와 볼가강변의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오래된 트램의 철로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오랜만에 먹은 비빔밥으로 식욕이 폭발했는지 자꾸 입이 심심하다.
작은 슈퍼에 들러.
저녁 간식으로 먹을 닭날개와 튀긴 김밥처럼 생긴 롤 두 개를 포장한다.
크렘린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는 사이.
검은 구름은 촉수와 같은 비를 흩날리며 빠르게 흘러간다.
숙소로 돌아와 그동안 뒤섞여버린 짐들을 정리한다.
"어라, 10루블은 철로 만드는 것인가?"
냉장고 자석에 달라붙은 10루블 동전, 자석에 붙는 동전은 처음 본다.
"동전 지갑에 자석을 넣어 놓으면 편하겠는데."
첼니에서 휴식을 보내고 자전거를 다시 타다 보니 허벅지가 묵직하게 뭉쳐있다.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뻐근하게 느껴진다.
"하루에 풀어지려나. 하루를 더 쉬어야 하나."
몽골 여행 중인 파박님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즐거운 수다처럼 오랜 통화를 하고.
11시, 컴퓨터 자료를 정리하는 중 옆 침대를 사용하는 사람이 들어오고, 누군가 나를 향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한다.
이어폰을 빼고 커튼을 열어보니 젊은 여자가 러시아어로 나에게 아주 긴 문장의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나 러시아말 못 해."
여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빙긋 웃으며 말을 하자 당황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Open the window?"
조금 더운 방 안의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겠다고 한다.
"창문을 열겠다는 러시아말은 이렇게 긴 문장이 필요한 것인가?"
여자는 창문을 열고 옆 침대로 들어간다.
"어라, 직원이 아니야?"
게스트 하우스는 남녀가 함께 쓰는 시스템인가 보다.
"어허, 이러면 신경 쓰이는데."
개인적으로 조금 시끄럽고, 냄새도 나고, 칙칙한 분위기지만 남자들이 쓰는 방이 훨씬 편하고 좋다.
"자자."
2시가 넘어 기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