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37일 / 흐림・ 2도
바가니-라봇키
밤새 배앓이를 한 피곤한 날의 아침, 쌀쌀한 날씨는 계속된다. "이제 겨우 9월인데."
"춥다."
어젯밤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설사가 시작되어 여러 번 고생을 했다.
"샤슬릭이 이상했나?"
텐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햇볕과 이슬비가 번갈아 가며 변하는 날씨다.
"쉬고 싶네."
속을 따듯하게 만들기 위해 물을 끓이고.
따듯한 커피와 함께 오트밀로 부글거리는 뱃속을 달래본다.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11시가 훌쩍 넘어간다. 해가 짧아지며 라이딩 시간이 줄었는데, 궂은 날씨에 강한 맞바람마저 불어오니 오늘은 큰 욕심 없이 가는 데까지 가봐야겠다.
니즈니 노브고로드 100km, 욕심을 내면 하루면 충분한 거리지만 밤새 배앓이를 한 탓에 힘도 없고, 욱신거리는 안장통과 뭉쳐진 허벅지의 근육이 무겁기만 하다.
"이틀 동안 나눠서 가지 뭐."
차가운 기온에 겨울용 장갑을 꺼내들고.
천천히 고개들을 넘어간다.
"너 발각됐어. 빨리 도망가."
잠시 좋았던 햇살도 이내 짙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세상이 어두워진다.
순식간에 강한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빗줄기가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잠시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며 우의와 레인팬츠를 착용하고.
"배고픈데, 식당이 있으면 좋으련만."
오토바이를 탄 한 남자가 도로를 가로질러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추위와 바람으로 정신이 없는데, 남자는 나를 보더니 러시아말로 무언가 질문을 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말끝마다 '엉?'이라는 추임새로 뭔가를 묻는 듯 보이지만 러시아말을 못 한다는 제스처를 해도 계속해서 엉엉 거리며 떠들어 댄다.
"러시아어 못해요."
"...엉?, 엉?"
"모른다고요. 엉!"
우의와 레인팬츠를 입으면 비를 막을 수는 있지만 땀이 차고 답답해진다. 매일처럼 비가 내리던 중국에서는 숙소의 난방기에 옷과 신발을 말릴 수 있었지만 캠핑을 하면서 옷을 말리기란 불가능하다.
비가 멈춘다면 장작불을 피워 젖은 옷과 신발을 말릴 수도 있을 테지만 비는 멈추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잠시 쉴 수도 없게 엉엉 거리는 러시아 남자 때문에 바로 출발을 하려고 한다. 마침 순식간에 어두워졌던 하늘도 순식간에 밝아진다.
"이제 겨우 1시인데, 하루 종일 이런 날씨겠지."
밝은 햇살도 잠시, 멀리 거대한 회색 구름들이 내려앉아 있다. 마치 외계 생물체가 촉수를 뻗어 지상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듯한 풍경이다.
바람을 맞으며 다시 빗속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만해. 춥다고!"
30여 분을 달리고 작은 마을 지나친다. 적당한 카페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대형 슈퍼마켓을 발견한다.
"물과 빵을 사야 해."
물과 빵을 사기 위해 들어간 슈퍼의 식품코너 앞에서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진열된 치킨과 조리된 음식들을 보며 허기진 배는 꿀렁거리며 요동을 치고, 침샘은 폭발하고 만다.
작은 넓적다리 닭고기를 사려다 반 쪽으로 나누어 놓은 반 마리에 손이 가고, 커다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한 팩에 시선이 박힌다.
"안 돼. 정신 차렷!"
치킨 반 마리를 사 들고, 닭고기에 당근을 넣어 만든 조리 식품을 하나 사 든다.
슈퍼를 나와 입구의 벤치에 앉아 조리된 닭고기로 아침 겸 점심을 한다. 전자렌지에 데워 먹어야 하지만 그냥 먹어도 제법 맛이 좋다.
"햄버거보다 괜찮네."
좁아진 갓길을 따라 화물차들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자전거가 빨려 들어가며 신경이 예민해진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오는 날, 나를 지나치거나 마주 오는 화물차가 일으키는 소용돌이는 정말 위험하다. 마주 오는 차량의 바람은 강풍으로 정면을 때리며 자전거를 순간 휘청이게 만들고, 지나치는 차량은 순간적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며 자전거를 끌고 들어간다.
자전거를 피해 멀리 돌아가 주면 좋겠지만 러시아의 도로는 이상하게 폭이 좁고 갓길이 없다. 천천히 감속을 하며 지나쳐 주기를 바라지만 바쁜 화물차 운전자의 마음이 나와 같을까 싶다.
다행히 모든 운전자가 그렇지 않고, 감속을 하거나 멀리 돌아가 주는 운전자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누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한 달이 넘게 계속되고 반복되는 어머니의 병환에 의한 피로와 걱정, 짜증들이 묻어있는 말들이다.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재의 나에게 매일처럼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면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 달 동안 무겁게 가라앉은 심란함, 이제는 전화벨 소리에 피가 말리는 기분이 든다.
오죽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라도 전화를 걸까 하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마음이 너무나 무겁다.
"세계 여행을 해야겠어. 이렇게 더 살 수가 없다."
"언제 올 건데?"
"3년 아니면 5년. 내가 없는 동안 엄마가 아플 수도 있고 돌아가실 수도 있어."
"그래."
"혹여 여행 기간 중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혼자서 괜찮겠어?"
"니가 없으면 힘들지."
"혼자서 못할 것 같으면 안 갈게. 어때?"
"갔다 와. 어떻게든 해 볼게."
미안함, 미안함 그리고 미안함.
이 여행에서 돌아갈 수 있을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지 알 수는 없다.
거칠게 지나치는 차량을 향해 손아귀의 힘을 풀어도 그만인 것이 지금의 나에 삶이지만 이 여행을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다.
"선택했고 결정했다. 모든 과정과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선택에도 두려움은 없다. 나의 바람대로 이 여행을 끝마치고 싶다."
심란한 날씨처럼 깊게 내려앉은 마음의 무게다.
다시 거친 빗방울이 떨어지고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한다.
"이곳에서 캠핑을 할까?"
4시 반, 어떻게 페달을 밟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겨우 50km만을 이동했고 비는 계속될 것이다.
"조금만 더 가 보자."
크게 기역자를 그리며 휘어지는 고개를 넘고 다음 고개를 마주하고 라이딩을 정리한다.
"더 가기도 싫고 힘도 없다."
도로를 벗어나 나무숲 가운데 자리를 잡고.
몸도, 마음도,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젖어버린 하루다.
패니어에 넣어둔 치킨과 음식들을 치워두고 침낭만을 끌어당기며 얼어버린 몸을 녹인다.
"어쨌든 젖은 옷은 하룻밤이면 마르겠지만 내 마음은 언제쯤 마를 수 있을까."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 너는 나를 토닥거린다.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 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
너는 자꾸 토닥거린다.
나도 자꾸 토닥거린다.
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토닥거리다가 잠든다." -김재진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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