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33일 / 흐림
카잔
이글과 함께 카잔 크렘린을 구경하고, 카잔에서 자전거 세계일주를 했다는 사람을 만나기로 한다.
이글은 아침부터 어제 산 오트밀을 먹는 방법을 알려준다.
"뜨거운 물을 이만큼만 넣고."
"물을 1:1로 넣어야 해."
"그리고 5분 정도 기다려야 해."
"이글, 여기 봉지에 조리법 다 나와있는데."
정말 이 꼼꼼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싶다. 이글이 사준 오트밀은 조그만 봉지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고, 과일들이 들어가 있어 달콤한 맛이 아주 좋다.
일다의 집에서 아침으로 먹었듯이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좋은 음식인 것 같다.
제법 바람이 분다. 카잔의 요즘 날씨는 예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
아파트 렌트를 하루 더 연장하기 위해 주인을 기다리고.
이글은 숙소를 연장한다.
크렘린으로 가기 전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러시아의 식사고 자주 먹다 보니 꽤 재미있고 괜찮다. 물론 러시아의 수프는 처음부터 반해버린 음식이다.
"근데 빵은 꼭 먹어야 하는 건가?"
이글은 나에게 운전면허증이 있냐고 묻는다. 러시아에서 외출을 할 때 신분증을 소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데, 나는 운전면허증이 있다고 답하고 이글은 면허증을 챙기라며 바보 같은 대화를 서로 하고 있다.
이글의 신분증, 러시아의 독수리 문장이 인상적이다.
"이글, 가운데 백마를 탄 기사는 뭐야?"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 싶다. 러시아 문장의 백마를 탄 방패의 문양은 악과의 투쟁을 뜻한다고 한다.
잠시 택시를 기다리며 공원에서 쉬고.
카잔의 크렘린으로 이동한다.
카잔의 첫날 야경으로 보았던 관공서 건물로 걸어간다.
"사비, 난 엉터리 가이드야. 나무는 진짜가 아니었어."
야경의 조명 속에서 실루엣으로 보이던 나무는 나무 모양의 조형물이다.
"괜찮아. 저렇게 만든 놈이 나쁜 거지."
이글은 안내를 잘못했다며 바보스럽다고 반복한다.
대리석의 웅장한 건물은 꽤 매력적인 건물이다.
이글은 크렘린의 안내판을 보면서 자신도 이곳을 잘 모른다고 한다. 안드레보다는 낫지만 이글도 어쩔 수 없는 올드맨이다.
"이글, 여기에 다 있어."
구글맵을 보여주며 핸드폰을 흔들자, 이글은 아직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다며 웃는다.
"이글, 이쪽이야!"
처음으로 보는 서양의 성곽이다.
성곽을 따라 걷는다.
"독특하고 예쁘다."
성벽 너머 모스크의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히고.
"잠시만 이 길이 아닌데."
성벽에 정신이 팔려 경로를 벗어나고 만다. 입구를 찾아 되돌아가니 이글은 사람들에게 입구를 물어본다.
"뭐야? 못 믿는 거야?"
크렘린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로 되돌아간다.
"무료야!"
크렘린의 입구에 기념품 가게가 있고.
초입의 관광 안내지도를 보며 이글의 설명이 시작된다. 말이 통하면 이글의 설명을 들으며 걸으면 되는데, 번역기를 사용하느라 핸드폰만을 쳐다봐야 하는 형국이다.
"이글 가자. 정보는 인터넷에 다 있어."
몇 걸음을 옮기고 붉은 벽돌의 탑을 보며 이글의 설명이 다시 시작된다.
"사비, 번역기를 열어줘."
한국어와 러시아의 번역은 아직 오류가 많아서 내용을 확인하려면 여러번 번역기를 사용해야 한다.
"이글, 그냥 인터넷으로 찾아볼게. 그냥 가자."
강제 결혼을 거부하고 여왕이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붉은 벽돌의 타워는 크렘린에서 첫 번째로 시선을 사로잡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타워 지하의 묘지들은 투명 유리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비석처럼 보이는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크렘린의 내부에는 여러 곳의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타워 측면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가 크렘린의 엽서를 사고.
"따듯한 불빛을 갖은 도시다."
박물관은 타타르스탄의 역사에 대한 유물들이 있는 박물관이다.
과거 몽골인들의 후예인 타타르스탄의 역사는 몽골의 역사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
"역시 박물관은 재미가 없어."
현재의 카잔 크렘린은 크게 정교회와 모스크, 박물관들과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건물을 구경하고.
"저건 관공서인가? 색깔도 참 예쁘게 칠했네."
모스크로 이동한다. 하늘색의 아치형 돔과 네 개의 첨탑, 정교한 모형처럼 느껴진다.
"이글, 여기 봐!"
"피스, 우리 이글은 평화주의자랍니다."
모스크의 내부 모습도, 잘 짜인 모형처럼 빈틈이 없다.
아름다운 느낌보다는 잘 만들어진 건물처럼 느껴진다.
"아스타나에서 너무 아름다운 모스크를 봐 버렸나?"
"정확하게 이런 느낌이다."
정교하게 잘 짜인 조형물.
모스크의 외부를 구경하는 동안 이글은 기념품 가게에서 망부석이 되어있다.
"뭔데? 바르간."
이글이 연주를 하는 바르간의 기념품 가게다.
망부석이 된 이글를 두고 주변의 기념품 가게에서 카잔의 자석을 산다.
"이쁜 것들도 많네."
바르간은 말굽 모양으로 생겨서 입에 물고 손으로 튕기며 소리는 내는 악기인데,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악기라고도 하고, 몽골의 위쪽에 위치한 러시아의 부족민들이 사용하는 악기처럼 보인다.
이글이 보여준 영상들을 보면 샤먼 음악처럼 들린다.
이글이 연주를 하는 소리를 들으면 묘한 울림 같은 것이 있다. 이글은 기념품 가게에서 바르간을 만드는 명장의 연락처를 얻었다며 행복해한다.
크렘린의 반대쪽에는 흰색의 성탑 위로 시계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여기가 정문이네."
흰 백색의 카잔 크렘린, 평범하고 단순한 색의 성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가."
"성을 이렇게 예쁘게 만들면 쳐들어올 마음마저 상실하겠네."
크렘린의 정문 측면에는 전쟁 영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강렬하고 상징적인 조각상인데 주변 공사 때문에 정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크렘린의 광장 맞은편에는 멋진 석조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자 이글은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한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재촉을 한다.
"난 그 사람이 궁금하지 않아. 여기 도시의 풍경이 더 중요해."
이글은 정색을 하며 그 사람과 이미 약속을 했다며 당황한다.
"이글, 농담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러시아의 유머 코드는 너무 진지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내게 주려고 하는 이글은 언제나 너무 바쁘다.
"이글,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들 중에 하나야."
이글이 화장실에 간 사이 자세히 둘러보지 못한 크렘린의 내부를 천천히 눈에 담고.
"저 탑은 볼수록 삐딱하네."
크렘린의 모습보다 이글의 설명 번역기를 더 많이 보아야 했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남겨도 좋다.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크렘린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지만 소식이 없다.
한참을 기다린 후 처음 택시에서 내렸던 관공서 건물 방향으로 이동하고.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바람이 시작되고.
비는 강해지고.
이글의 마음도 타들어 간다.
한 시간이 지나도 택시는 소식이 없다.
"내가 우버 택시라도 불러야 하나?"
한 시간이 지나 이글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앞장을 선다.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역시 아날로그 형이야."
카잔의 버스를 탄다.
"버스도 타보고 좋네."
도시의 버스에도 요금을 받는 여자 승무원이 있다.
"아, 설마 했다."
카드 단말기를 들고, 승객에게 다가가 버스비를 결제하는 시스템이다.
버스는 대학가를 지나며 민원버스가 되고, 여자 승무원은 비좁은 틈을 움직이며 버스비를 결제한다.
앞뒤 문으로 승하차를 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렇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에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신기하다.
숙소 아파트로 돌아와 이글의 차를 타고 자전거 세계일주를 했다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성격상 타인의 경험에 크게 관심이 없지만 이글이 나를 위해 어렵게 마련한 자리이니 감사할 뿐이다.
여행은 각자의 삶이다. 누군가의 삶이 나의 삶이 될 수 없듯이 타인의 여행담이 나의 여행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건강하게 좋은 여행을 즐겨라'라는 말보다 좋은 경험담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락가락을 반복하는 빗속을 달리고, 카잔의 시 외곽에 있는 남자의 집으로 간다.
포. 남자의 작은 집에는 엠티비와 사이클이 다섯 대가 놓여있다.
"하하하, 이 형님 매니아네."
세계투어의 깃발들과 자전거 관련 메달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커다란 성조기다.
"아니 왜? 러시아 집에 미국의 성조기가 이렇게 큰 것이?"
여행에 대해 짧은 설명을 듣고, 말이 너무나 빠른 스타일이라 머리가 아파온다.
일단 저녁을 먹자고 한다. 직접 만든 음식들인데 너무나 맛이 좋다.
브랜디, 이글은 브랜디가 위스키나 코냑보다 좋은 것이라고 알려준다.
"어 그래."
양주를 전혀 먹지 않아 관심도 없었지만 나의 게으름에서 고기는 모두 고기이고, 술은 모두 술일뿐이다.
세상의 고기와 술에는 어떻게 좋은가의 문제만 있을 뿐, 어떤 게 좋은가의 문제는 나에게 없다.
"향이 좋고 부드러운 술이다."
포는 음식과 비상식량들을 잔뜩 선물을 한다.
"아이고, 이글이 챙겨놓은 짐들도 엄청난데."
포의 세계일주는 자신의 우상이라고 하는 카잔 출신의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경로를 따라 다시 세계일주를 한 것 같다.
동료 한 명과 카잔을 출발하여 유럽과 북아메리카, 아시아를 지나 러시아로 돌아오는 경로다.
"백년 전에 세계를 돌았다는 말이지."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소 여행이라고 말하지만, 백년 전의 여행은 모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네."
다른 하나의 깃발은 인상적인 설명이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름과 겨울의 여신이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포 일행의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내일 카잔을 빠져나가는 경로를 안내하겠다는 제안에 감사를 표한다.
카잔에서 니즈니노브도로드로 가는 길에 포의 동네가 있다.
밤하늘이 신기하다. 아주 오래된 물탱크를 구경하는 동안 포는 슈파에 들러 집에서 주었던 브랜디 한 병을 선물한다.
"스바시바!"
그는 여행자의 삶을 이해하는 멋진 사람이다.
안개비가 내리는 밤, 피곤함이 밀려온다. 좋은 사람과의 좋은 인연이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택시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과 신호등,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브레이크등의 불빛이 다채롭다.
세상에는 다양한 빛들이 있다.
안드레, 이글, 보바, 포......
모두를 담기에 내 가슴은 너무나 좁다.
내 가슴의 그릇이 차고 넘치지 않도록.
그래서 게으름을 피운다.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 있는 한두 사람이면 충분하다.
진심을 다하여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한 명이라도 좋다.
그런 친구면 충분하다.
"안드레, 이글, 보바. 너희들이면 충분해!"
"Great Thanks :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에릭스도자기, 찬숙, 이지, 혜영, 카일라스, 에릭누나, 달그림자, 불타, 파라, 뜨락, 고고싱, 부침이, 마이크로, 둥이, 장미, 일루, 앳찌, 짱돌, 울산 바이크하우스, 다빈치, 나도달인, 폴/해바라기, 걍바다, 유나, 김혜숙 산부인과, 일산쭈니, 소미에이, 고양을, 감사리, 파도, 방가/나리, 김윤구, 세콤염기섭, 최정현, 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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