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반, 반강제적으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떠날 준비를 한다. 패니어들을 정리하고 하나둘씩 꺼내어 자전거에 장착을 하니 러시아 친구는 작업복을 입고 문을 잠가달라는 제스처를 하고 숙소를 나갔다.
아마도 룹촙스크에 일을 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온 듯하다.
아침은 월터식으로 간단히 해결을 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아침부터 배속이 요란하다.
베이징을 떠날 때 설사로 인해 고생한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속이 편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가끔 시내로 들어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이러는 것 같다. 그렇다고 평소와 다른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두어 차례 화장실을 방문하고, 시장에 나가 고기를 먹고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출발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의 국경까지 40km 정도, 그리고 세메이까지 100km 정도의 거리를 더 가야 한다.
"세메이까지는 무리고, 중간에서 캠핑을 하자."
룹촙스크를 빠져나오는 길은 단순했다. 그냥 직진이다.
A322 도로에 진입하고 세메이까지 144km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굳이 다른 나라 도시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것을 보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관계는 아주 좋은가 보다.
오래된 자전거 펌프를 가지고 다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라이딩을 하고.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기찻길의 승차장에서 잠시 쉬었다.
앙증맞게 작은 기차의 승차장, 트램의 승차장은 아닌데 이런 곳에서 정차를 하고 승객을 태울까도 싶다.
30km 정도를 이동하니 국경의 마지막 마을이 나타난다.
작은 마을의 초입에서 환타와 같은 음료수로 갈증을 해결하고, 주변을 검색하니 가까운 곳에 마리아-라 슈퍼가 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슈퍼로 들어가 캠핑을 할 식량들을 보충한다. 50루블 크림빵, 요거트, 아주 작은 냉동만두를 조금 담고, 닭 날개만을 모아놓은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문제의 물, 항상 먹던 물은 작은 용량만 있어 비싸고 탄산수만 진열되어 있다. 이것저것을 흔들어 봐도 모두 탄산수다.
직원에게 물어보기도 귀찮고, 그냥 탄산수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슈퍼 앞의 벤치에서 닭 날개 부위로 점심을 대신한다. 3일째 닭만 먹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며 구글맵을 확인하니 국경까지 9km 정도의 거리다.
페달링은 느긋해지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몽골-러시아의 구경을 넘어온 터라 불안하거나 조급한 마음이 없다.
휑하게 변했던 도로의 주변에서 멀리 검문소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보이고.
바르나울에서 시작된 거리 안내판은 마지막 336을 알려준다.
"국경이야, 휴게소야?"
몇 대의 차량들이 정차되어 있고, 몇몇의 차량들은 왼쪽의 도로를 이용해 그냥 지나간다.
"어쨌든 사진은 찍고."
"레드, 블루, 화이트. 간결하고 깨끗한 조합이다."
차량들이 지나가는 좌측의 도로를 따라가려다 차단기가 내려진 출입구를 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미그레이션인가?"
두 대의 승용차가 출입구를 향해 대기하고 있어, 잠시 고민을 하다 탑승자에게 물었다.
"카자흐스탄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조수석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는 차단기가 내려진 곳을 가리켰다.
잠시 차단기 앞에서 기다리니 차단기가 올라가고 승용차의 탑승자가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한다.
마당을 지나 승용차의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단층의 작은 건물로 들어가고, 그들을 뒤따라 가니 군복을 입은 남자가 '세울'이라고 묻고는 건물로 들어가라고 안내한다.
작은 건물은 러시아의 출국사무실, 서너 명의 사람이 출국 심사를 받고 있고 마지막으로 심사창구의 앞에 섰다.
영어를 하냐며 러시아 억양으로 말을 하는 남자의 영어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몇 차례 '왓', '아이 돈 노우'를 말하자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너 발음 무지하게 구려. 자식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묻는 질문도 이상하다.
"어디로 갈 거야?"
"여기서 카자흐스탄 밖에 더 있냐?"
"자전거 어디에서 샀어?"
"소개해 줄까? 김포 자전거 가게!"
"자전거 번호 갖고 있어?"
"한국엔 그딴 거 없어!"
짜증스러운 얼굴로 옆에 서있던 직원과 시시덕거리더니 출국 도장을 찍어준다. 내가 구린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인지 아니면 동양인에 대한 비하의 웃음인지 모르겠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면 쓸데없는 것에 감정을 소비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존감이 강한 편이라 의미 없는 하찮은 외부 자극에 무신경하다.
"굿럭, 웰컴 투 카자흐스탄."
"네가 왜 웰컴투를 해!"
출국 사무실을 나오니 세울을 말하며 웃던 군인이 미소를 지으며 패니어를 열어 달라고 한다.
앞뒤 패니어를 열자 훑어보지도 않고 끝났으니 가보라며 출구 쪽을 안내하고 인사를 한다.
"네가 제일 마음에 든다."
러시아 검문소를 나와 길을 따라가니 바로 카자흐스탄 검문소가 나온다.
"입출국을 공동으로 한꺼번에 할 수는 없는가?"
카자흐스탄 검문소의 입구에는 몸이 마른 남자가 통제를 하고 있다. 이번에도 영어를 하는지 묻더니 이상한 질문들을 한다.
"어디로 가냐?"
"카자흐스탄 가려고 여기 왔잖아!"
"키르기스스탄?"
"다시 러시아로 갈 건데."
"오홍?"
아마도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키르기스스탄으로 간 모양이다.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두 질문을 하고 검문소에 있던 군인의 영어 회화는 모두 바닥이 났다. 이후의 모든 질문에는 난데없는 How가 모두 붙었고, 하우 다음에는 바디랭귀지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체류 확인증을 주며 적어야 할 곳에 체크를 해주어 이름과 국가, 방문 목적을 적고 사인을 하고 보여주니 차단기 앞을 가리키며 말한다.
"하우 스탑!"
"어, 그래."
한참을 차단기 앞에서 기다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량들을 먼저 보내더니, 그제서야 검문소 확인증을 건네주고 길을 안내한다.
"음, 하우 넘버 원!"
자전거를 끄는 시늉을 하고, 걷는 시늉을 하더니 입국 사무소를 가리키며 재차 '하우 넘버 원'을 외친다.
"그만해. 쉐리야!"
하우 끌바로 차량들이 줄 서있는 곳에 자전거를 놓고, 하우 워킹으로 입국 사무소의 하우 넘버 원 출입문을 들어갔다.
입국 사무소에는 여덟 명 정도의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고, 입국 심사는 3분 정도 소요되었다.
마지막 내 차례가 돌아올 때쯤 한무리의 사람들이 입국 사무실로 들어오고.
동양인 외모의 심사관은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뭔가가 어설퍼 보인다.
역시나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묻더니 이후에는 러시아말인지, 카자흐스탄말인지 모르겠지만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여러 국가의 비자 정보가 적혀있는 듯한 매뉴얼에서 태극기를 알려주었더니 사증 페이지를 추가해 놓은 두툼한 내 여권을 계속해서 들춰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