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8일 / 맑음 ・ 28도
세미온노브카-아크큐
파블로다르를 향해서 달려간다. 아침부터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이 심상치 않다.
아침부터 찬바람이 불어온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자작 나뭇잎 소리가 너무나 좋다.
쌀쌀한 기운 탓에 침낭 속을 벗어나기가 싫다.
"자연의 알람이라니?"
한 무리의 말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뛰어가는 통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아침으로 예브게니 아저씨가 준 전투식량 중 메밀죽을 선택하고.
메밀죽과 장조림은 메밀밥과 야채 통조림이다. 고르노 알타이스크에서 러시아의 전투식량들의 내용물을 안드레가 알려줬는데 약간 차이가 있다. 번역기의 오류겠지 싶다.
전투 식량들이 하나같이 맛이 좋다. 러시아 장교들은 전쟁이 나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 싶다.
텐트를 정리하고 출발을 준비한다. 파블로다르까지 210km 정도가 남았고, 오늘 가급적이면 많은 거리를 줄여놓고 내일 파블로다르에 일찍 도착하고 싶다.
여행을 하다 보니 혼잡하고 숙박비가 비싼 도시는 일찍 들어가 숙소를 잡은 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오늘도 평평한 카자흐스탄의 초원을 달려야 한다. 맞바람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가 심상치 않아 바람막이를 꺼내어 입고 출발을 한다.
"바람이라면 이제 이골이 난다."
이번 이정표에는 누르술탄이 아니고 아스타나로 적혀있다. 645km.
한 시간을 달리고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며 어제 세메이에서 사놓은 빵으로 부지런히 먹어둔다.
"오늘 꽤나 힘든 라이딩이 될 것 같아."
빵을 먹는 동안 작은 나비가 손등을 타고 내려앉는다.
"어디서 온 거니?"
바람이 힘들다. 그리고 30도를 향해 오르는 기온은 불어오는 바람으로도 더위를 식히지 못한다.
"하나만 해. 하나만!"
기분 탓인지 아니면 바람 탓인지 계속 오르막을 올라가는 기분이다.
멀리 높은 송신탑이 보이고.
작은 식당이 하나 있다.
"시원한 물!"
식당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한 부부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사진을 찍히고.
겨우 식당으로 들어가 카운터의 아주머니에게 10,000텡게를 보여주니 고개를 가로 젖는다. 주머니 속에 잔돈은 500텡게 밖에 없는데 밥값은 800텡게.
카자흐스탄의 작은 슈퍼나 음식점에서 10,000텡게를 쪼개는 것이 어렵다. 잔돈들을 모았지만 세메이의 숙소에서 10,000텡게를 받고 되돌려줄 잔돈이 없다고 해서 모아둔 잔돈을 모두 써버렸다.
"밥 못 먹는 거야?"
조금 전 정신없이 사진을 찍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지갑에서 5,000텡게 두 장을 꺼내어 돈을 교환해 준다.
5,000텡게를 흔들며 웃으니 아주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것을 보고 남자는 5,000텡게도 쪼개주겠다며 2,000텡게와 1,000텡게로 나눠 교환해 준다.
메뉴 중, 느낌대로 아무거나 주문을 하니 감자와 고기가 들어간 면요리가 나온다.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오늘의 컨셉은 부지런히 먹고 바람과 한 판 부대껴보는 것이다.
밥을 먹는 동안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안쪽으로 들여놓으라고 한다.
"허허벌판에 누가 있다고?"
밖으로 나가니 십여 명의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고, 그들에게 붙잡혀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힌다.
"아, 이 귀여운 사람들을 어떻게 하냐."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곳에서 사진들을 업로드하고.
"초원의 바람은 정말 답이 없다."
몽골이 2,000미터의 초원 지대라면 카자흐스탄은 100미터 이내의 초원이다. 하늘과 구름의 색과 모양이 다를 뿐 주변의 풍경은 거의 흡사하다.
잠시 공사 중인 도로를 만나 당황했지만.
우회하는 비포장도로는 짧게 끝이 난다.
"놀랐다야."
새로 아스팔트가 깔리고 버스 정류장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쉬고.
바람과 더위 속에 전혀 변하지 않는 풍경 속을 한 시간 반 동안 달린다.
"그늘도 없어!"
오르막의 끝에 다다르고 적당한 소나무 그늘을 찾으며 힘들게 이동을 하던 중.
도로변의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를 내던지듯 세워놓고 가게 안으로 직행한다.
콜라를 집어 드는 할머니에게 연신 손사래를 치며, 어제 젊은 남자들이 주었던 음료를 달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문 앞에 있는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와 온몸에 물을 적시고.
그늘에 앉아 음료수를 드링킹.
"아, 살 것 같다."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가 사그라들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화물차의 운전자가 나와 자전거와 나에게 관심을 갖는다.
말을 붙이기가 무섭게 인사를 하더니 인스타그램을 등록하고 영상을 찍는다. 아마도 인스타그램의 스토리를 올리는 모양이다.
처음 찍은 영상이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영상을 찍으며 나에게 인사말을 강요하고.
"하이, 아임 싸비. 트레.."
인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뭔가를 중얼거리며 자기말을 하더니 촬영을 종료한다.
물을 가리키며 뭔가를 말하고 화물차에서 물 두 통을 가져와 패니어에 끼워 넣는다.
"야, 찬물을 줘야지. 그건 짐이야!"
주는 것을 사양할 수도 없고, 졸지에 미지근한 물 부자가 돼버렸다.
"고맙다. 발 씻을 때 쓸게."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어느새 솜뭉치 같은 구름이 가득하고.
다시 40여 분을 달리고 도로변에 있는 식당으로 이끌리듯 들어간다.
"그늘!"
식당에는 슈퍼를 겸하고 있어 카운터로 걸어가 음료수를 달라 애원한다.
"아니, 저기 레몬! 레몬!"
동전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아주머니의 동전통이 가득하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밥은 안 먹는지를 묻는다. 알 수 없는 메뉴 중 양고기가 들어간다는 수프를 주문하고.
큼지막한 양고기가 들어간 야채수프와 빵, 그리고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건네준 카바스와 같은 시원 음료로 식사를 한다.
꽤 괜찮은 맛이고, 오늘 저녁은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6시가 넘어가며 조금씩 바람의 강도도 약해져 가고.
도로에 정차시킨 세 대의 차량에서 가족들이 내리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가족들과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갑자기 차의 트렁크를 열더니 음식들을 비닐봉지에 담아준다.
차갑게 보관을 한 피자처럼 좋은 냄새가 나는 빵도 넣어주고.
사진을 찍는 동안 음식을 넣은 비닐봉지는 자전거의 후미에 매달아 놓았다.
"음, 미학적 관점에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고맙고, 오늘 저녁 걱정이 없네."
봉지에 담긴 우유로 갈증을 달래고.
7시가 되면서 하루 종일 괴롭히던 바람은 페달링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줄어든다.
"좀 달려 볼까."
지평선을 향해 떨어지는 해를 두고 멀리 오늘의 목적지 아크큐의 실루엣이 보인다.
"10km는 족히 넘겠는데."
구불구불 이어지는 아르티시 강을 따라 15km 정도를 달려 아크큐에 도착한다.
양을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저씨의 모습은 몽골의 목동들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마을의 초입 버스 정류장에서 구글맵으로 야영지를 찾는 동안 승용차에서 내린 젊은 남자의 가족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예르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사진을 찍은 후, 바쁘게 차량 안을 뒤적이더니 500텡게와 동전을 주고 웃으며 떠난다.
카자흐스탄으로 와서 낯선 여행자에 대한 경계의 눈빛이나 몸짓, 불온한 시선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하나같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밝게 웃어준다. 정말 정이 많고 편안한 사람들이다.
8시 50분, 하루 종일 불어온 맞바람 때문에 생각했던 시간보다 많이 늦어졌다. 캠핑을 할 장소를 찾으며 도로를 따라가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초원이 이어진다.
아르티시 강이 도로와 근접해지는 지점에서 강변에 텐트를 치려고 했지만 강은 하천과 비슷할 만큼 작고, 시야에 완전히 오픈되어 있다.
강의 건너편 초원과의 경계에 작은 나무 군락지로 들어간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식당에서 화물차 남자에게 받은 물로 팔과 다리를 씻어낸다.
지평선으로 빠르게 해가 떨어진다.
"힘든 하루였다."
마지막 가족이 비닐봉지에 넣어준 사과와 오이 그리고 피자 같은 빵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든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고, 잠시 소변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니 까만 하늘에 별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다.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은하수로 보이는 별의 무리들이 하늘 위로 가로질러 이어지는 밤하늘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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