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날씨가 흐리다. 조식 타임과 체크아웃 시간이 빠른 호스텔이라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8시, 어렵게 잠에서 깨어 식당으로 내려간다. 생각보다 호스텔의 조식은 괜찮은 편이고, 무엇보다 자율배식이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좋다. 소시지와 스크럼블, 시리얼과 커피로 두 접시를 비운다.
9시, 낑낑거리며 패니어들을 옮기고 출발 준비를 한다.
구글맵을 확인하니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나는 것은 아주 심플한 경로다. 521번 도로를 따라가다 Gedern이라는 마을에서 275번 도로로 이어가면 될 것 같다. 100km 정도를 이동해야 하는 일정, Gedern 근처의 지형과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경로의 모양이 수상하다.
"산악지형들인가? 일단 Gedern까지 고!"
뤼머광장으로 가서 관광객들이 없이 목조건물들을 한번 더 둘러본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의 목조주택이 더 소박하고 예쁜 것 같다. 독일의 목조주택들은 색과 무늬가 더 강렬한 느낌이다.
"뉘신지?"
프랑크푸르트의 성당의 붉은 벽돌, 이후 프랑크푸르트를 떠올린다면 적벽돌의 붉은 느낌이 생각날 것 같다. 수많은 낙서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난다.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시내의 외곽에 있는 마트에 들러 비상식을 보충한다. 큰 마을이나 도시를 거치지 않는 오늘의 경로라 슈퍼마켓을 찾는 것이 쉬울 것 같지 않다.
"환불받아야지."
페트병을 수거기기에 넣으니 별 반응이 없다. 다른 것을 넣어봐도 똑같다. 모양이 찌그러져서 인식을 못하는 것인가 싶어 바람을 넣어봐도 역시나 인식이 안된다.
다른 수거함을 점검하고 있던 직원이 독일어로 무뚝뚝하게 뭔가를 말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마지막 콜라 페트병을 넣으니 기기가 수거를 한다.
"뭐야? 뭐가 다른 거야?"
잠시 차이가 뭔지 생각을 해보니 바코드가 박힌 비닐포장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두 개의 페트병은 물통 케이지에 쓸리면서 비닐포장지가 뜯긴 상태다.
"에쉬, 내 50센트!"
빵, 바나나, 커피, 콜라 등을 사고, 콜라병을 확인하니 바코드 위에 환불 마크가 붙어있다. 환불마크가 있는 페트병만을 수거하는 모양이다.
"이거로군!"
오늘따라 자전거가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산을 지나오며 쌓인 근육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감기 기운은 밖으로 나오니 조금 덜하고 콧물을 닦느라 바쁘지만 곧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씩 강해지는 빗줄기에 레인 팬츠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521번 도로를 따라간다. 오늘도 내비게이션과의 신경전이 시작된다.
"베를린까지 시간 없어. 도로 타고 갈 거야!"
빗속에서 한참을 내달린 후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어간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탓인지 허기짐은 없다.
"곧 맑아지려나?"
하루 종일 비가 내릴 것 같던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기 시작하지만 왠지 모르게 도로는 산을 향해 다가가는 느낌이다.
"너의 의미는 무엇이냐?"
275번 도로에 접어들며 긴 오르막이 시작되고, 가슴으로 땀들이 흘러내리며 축축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전해진다.
"비에 젖고, 땀에 젖고. 남은 건 눈물인가?"
문제의 Gedern에 도착한다. 시야에 산이나 언덕의 풍경은 들어오지 않는 평범한 작은 마을이다.
잠시 내비게이션의 경로가 엇갈리는 갈림길에서 지도를 확인한다.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뭔가를 말하며 뒤로 되돌아 가라는 제스처를 한다. 여자는 도로를 따라가면 높이 올라가야 한다며 옆으로 돌아가는 작은 도로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도를 보니 9km 정도의 거리에서 두 길은 다시 만난다.
"그럼, 알려준 도로를 따라서."
여자가 알려주는 도로는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멀리 왼쪽으로 275번 도로가 지나가는 숲길이 눈에 들어오지만 산의 높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오르막과 내리막, 다시 오르막이 반복되는 사이 페달링의 힘이 떨어져 간다.
산 위의 작은 마을을 지나치고, 산의 정상에는 어김없이 바람개비들이 신나게 돌아가고 있다.
"저 산과 다른 것이 무엇이었을까?"
한 시간이 지나 어렵게 275번 도로를 다시 마주한다.
"루터바흐? 여기까지 가야겠네."
4시, 일몰까지 두 시간의 여유가 있어 30km 떨어진 루터바흐까지 달려 보기로 한다.
나지막이 떨어지는 도로를 따라 한 시간 업힐의 보상을 대신하며 신나게 질주를 한다.
"좋아! 딱 20km만 이렇게."
10km 정도 이어지던 내리막은 끝나고, S자로 휘어지는 도로를 따라 바람의 방향도 맞바람으로 바뀐다.
바람을 이겨가며 느릿하게 페달을 밟는 사이 맑은 하늘빛이 얼굴을 내민다.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루터바흐가 가까워진다.
"동네, 참 예쁘네."
언덕 위의 집들을 사진 찍고 출발을 하려니 바로 앞에 한 남자가 서서 인사를 한다.
"한국분이세요?"
밝게 웃는 남자는 어디를 가는지 물으며 의아해한다.
"캠핑을 한다고요?"
어딘가 약속이 있어 가는 도중 나를 보고 차를 멈췄다는 남자는 오늘 밤 어디서 숙박을 하는지 묻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한다.
"추운데 어떻게 밖에서 자요?"
"이 정도면 따듯한 거예요. 노르웨이에서도 캠핑을 했는데요 뭘."
잠시 고민을 하던 남자는 내가 사진을 찍던 방향을 가리키며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보내고 가라고 한다.
허브스테인, 루터바흐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이혁 목사님이다.
목사님을 따라 예쁜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 예쁜 집이 목사님 댁인가요?"
"아니오. 시청입니다."
"시청요?"
2,0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허브스테인은 과거 천주교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 작은 마을이지만 시의 행정지였던 모양이다.
목사님의 교회에 들어가 사모님과 10대 후반의 원석과 인사를 한다.
수련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회는 규모가 꽤 큰 건물이다. 세미나 약속이 있어 바로 떠나야 하는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새해 첫날, 자정에 맞춰 요란한 폭죽들이 30여 분간 계속해서 터진다. 중국의 춘절에 비하면 아이들의 장난 수준이지만.
"해피 뉴 이어!"
9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깬다. 안개가 내려앉은 흐린 날이라 아침해는 볼 수가 없다. 늦잠을 잔 탓에 모닝커피만을 끓여 마시고 출발을 서두른다.
브뤼셀까지 80km, 벨기에의 첫 번째 라이딩을 시작한다.
"가자, 브뤼셀로!"
기찻길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길을 이어간다. 단조로운 풍경이 조금은 아쉽지만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니 편하기는 하다.
"아, 벌써 네덜란드의 자전거 도로가 그리워진다."
작은 타운의 작은 기차역들을 하나둘씩 지나치고.
공원길에 들어서며 잠시 길을 헤매고.
다시 기찻길 옆 자전거 도로를 만난다.
"이상하게 이걸 보면 사진을 찍고 싶단 말이지."
계속해서 작은 타운의 마을들을 지나간다.
벨기에의 집들은 특색이 없고, 정원이 없어서인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진다.
속도를 내어 쉽게 기찻길을 따라간다.
"이런 신호등 시스템은 배웠으면 좋겠다."
벨기에의 첫 번째 도시 안트베르펜에 들어선다.
멀리 보이는 고층빌딩의 실루엣이 그동안 유럽을 여행하며 볼 수 없었던 도시의 풍경이라 어색한 느낌이 든다.
안트베르펜의 초입의 공원에서 잠시 쉬어간다.
월터에게 네덜란드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먹는 올리에볼로 새해인사를 보낸다.
"사비, 새해 첫날에 야영을 한 거야?"
"하하하."
안트베르페의 중심을 지나며 멋진 석조건물과 구시가지의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아, 아쉽다. 시간이 없다."
바쁜 발걸음에 호기심이 생기는 안트베르펜의 시내 구경을 포기하고 브뤼셀로 향한다.
휴일이라 슈퍼마켓과 상점들이 영업을 하지 않아 문이 열린 도로변 작은 상점에서 콜라 한 병을 산다. 관광도시 외에는 휴일에 식료품을 구하기가 정말 힘든 유럽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우리의 편의점 시스템이나 프랜차이즈 시스템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생각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명절이나 연휴에도 쉴 수 없는 시스템이 각박하다 생각되기도 하다.
인도와 신호등 건널목의 턱들을 지나며 덜컹거리는 자전거에서 콜라가 떨어져 나뒹군다. 다행히 머리 부분이 조금 깨져서 아까운 콜라가 쏟아지지는 않는다.
패니어에 들어있던 빈 콜라병의 마개로 교환을 하고, 물통 케이지에 콜라를 끼워 넣는다. 겨울에는 물보다 콜라가 훨씬 갈증해소에 도움이 되고, 물보다 허기를 달래는 데에도 괜찮은 것 같다.
마을이나 타운에 들어서면 인도의 보도블록 위로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는 독일과 비슷하고, 매끄럽지 않은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생활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지만 네덜란드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숫자이다.
브뤼셀에 가까워지며 밋밋하던 도로변의 모습도 조금씩 오래된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로변의 풍경도 네덜란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특별함이 없는 모습이다.
"네덜란드가 유니크한 거야? 벨기에가 노멀한 거야?"
한때 같은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고, 조금은 어둡고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벨기에의 모습이다.
"네덜란드와 비슷할 것 같았는데, 전혀 다르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올리에볼로 허기를 채우고.
3시, 브뤼셀까지 20km 정도가 남아있고 늦어도 5시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디를 들렀다가 숙소로 갈까?"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숙소에 들어가기 전 브뤼셀의 구시가지를 구경할 생각이다.
"오줌 싸는 아이를 보고 숙소로 가자!"
브뤼셀하면 생각나는 구조물이 오줌을 싸는 아이의 동상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는다.
10km 정도를 남기고 브뤼셀의 경계에 들어선다.
"뭐라는 거야? 하여튼 환영한다네!"
시 외곽의 대형 쇼핑몰 앞에서 잠시 쉬며 숙소의 위치와 함께 브뤼셀 구시가지의 지도를 한번 더 확인한다.
"브뤼셀, 너의 모습을 보여줘!"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의 풍경은 조금 의아할 정도로 어수선하고 분위기도 어둡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여행한 다른 유럽 도시들의 깨끗함과 달리 도로변에 쓰레기들도 많이 널브러져 있고, 골목마다 줄을 이어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 복잡하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들의 주행모습도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뭐지, 이 혼란스러운 도시는?"
첫 번째 마주한 삼거리의 교차로, 트램과 차량들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움직이는 모습이 혼란스러움 그 자체다.
"뭔가, 아주 다른 도시다."
구 시가지로 향하던 길에 은은한 대리석의 멋진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 멋진데! 내일 구경해야겠다."
입구 부분을 보수공사 중이어서 조금 아쉽지만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성당의 모습이다.
잠시 대성당 근처에 있는 오줌싸개 소녀상을 찾아 구시가지의 골목으로 들어갔지만 식당들이 밀집한 지역에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자전거를 끌고 움직이는 것이 민폐다. 뒤돌아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아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데로 조각상의 주변에 도착했지만 오줌 싸는 소녀상은 찾을 수가 없다.
"나가자. 움직일 수가 없다."
브뤼셀 구시가지의 골목들은 폭이 좁고 돌바닥으로 되어있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가 없다. 대성당의 도로로 빠져나와 숙소 근처에 있는 오줌싸개 동상을 찾아 자전거를 끌고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흐름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며 복잡한 골목길들을 따라가지만 방향감을 유지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여기는 어디냐?"
작은 광장에 앉아 다시 한번 구시가지의 지도를 확인한다.
"정말 복잡한 구조네."
네비게이션을 확인하며 골목을 따라가고, 오줌싸개의 주변에 도착했지만 조각상은 보이질 않는다.
"아놔, 뭐야?"
구글 지도를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은 음식점의 대기줄이 아닌 오줌싸개 조각상이 있는 곳이다.
"저 작은 사이즈는 뭐지?"
음식점의 벽면에 세워진 아주 작은 조각상이다. 조각상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파고들 생각도 없지만 밀려오는 실망감에 가까이 가고 싶지가 않다.
"저게 뭐라고!"
어쩌면 처음 찾으려 했던 오줌싸개 소녀의 조각상도 너무나 작은 사이즈라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내일 확인하마."
예약해 두었던 호스텔은 큰 교회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간다.
너무나 한산한 숙소 내부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니, 인상이 좋은 할머니 한 분이 리셉션에서 말을 건넨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여기 호스텔이죠?"
호스텔을 확인하고 체크인을 하려고 하니 자전거를 타고 왔냐며 묻더니 먼저 자전거를 숙소 내부의 안마당으로 옮기라며 안내를 한다.
"오예!"
친절하게 안내를 하며 웃는 할머니의 미소가 좋다. 체크인을 하고 룸으로 들어가니 세 명의 젊은 청춘들이 침대에 널브러져 시체놀이를 하고 있다. 옷이며 잡동사니들의 제멋대로 놓여있는 모양새가 어젯밤 진하게 새해맞이를 한 모양이다.
패니어들을 보관함에 넣어두고 바로 밖으로 나와 음식점을 검색하고, 평가가 좋은 저렴한 케밥집을 찾아간다.
케밥집 주변에 도착하자 간접조명을 환하게 받고 있는 석조건물들의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조명이 화려하네. 뭐하는 장소지?"
지도를 확인하니 브뤼셀 시청 앞의 그랑플라스다.
광장의 중앙에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고.
광장의 중앙으로 이동하니 높은 첨탑이 하늘 높이 치솟은 브뤼셀의 시청 건물이 보인다.
"오, 조명빨 제대로 받네!"
다시 케밥집으로 되돌아가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로 테이블이 가득 차 있다. 그림 메뉴가 없어, 메뉴판을 들고 어렵게 빈 테이블에 앉아 메뉴들을 검색하며 주문을 받으러 오기를 기다린다.
가족단위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몰려든 타임이라 그런지 테이블에는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빈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들어온 순서대로 주문을 받는듯한 직원들이 좁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고, 다른 손님들이 어떤 메뉴를 선택하는 지켜보고 있으니 뭔가 언어가 이상하다.
"불어 같은데?"
뭔가 멜랑꼴리 한 발음들이 굴러다니는 것이 확실히 프랑스어가 맞는 것 같다.
"벨기에는 또 몇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거야?"
메뉴판을 뒤적이고 구글을 검색해 주문할 메뉴를 결정했지만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 주문을 받으러 오질 않는다.
"배고픈데 많이 기다려야겠어. 패쓰!"
그랑플라스 광장을 가로질러 맥도널드를 찾아간다. 광장의 주변에는 많은 노점들이 들어서 있고 먹을 것과 술 등을 팔고 있다.
철판에 해산물을 볶아주는 노점에서 홍합과 주꾸미 볶음을 눈여겨봐 두고 맥도널드로 가 급하게 허기를 달랜다.
맥도널드를 나와 그랑플라스 광장으로 돌아가고, 그랑플라스 광장에서는 광장 주변의 건물들에 화려한 조명들이 밝혀지며 조명쑈 같은 것이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