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92일 / 맑음 ・ 26도
에키바스투즈-토르트쿠두크
강한 초원의 바람이 불어온다. 아스타나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햇살, 창문과 하얀 커튼 그리고 살랑이는 바람. 아침을 맞이할 때의 이 느낌을 좋아한다.
짐들을 정리하고 출발을 서두른다.
식당의 여자는 어제 사놓은 얼음물을 가져가라며 테이블 위로 물을 챙겨준다.
"오늘의 아이템!"
딱히 다른 메뉴를 선택할 수 없어, 늘 그렇듯 먹어본 음식을 주문하고.
"은근히 괜찮단 말이야!"
오늘 가야 할 거리는 120km 정도의 파블로다르와 아크몰라의 경계지역이다. 아스타나에 도착하는 날의 거리를 최대한 줄여놓고 싶다.
어제부터 조금씩 불어오던 바람이 서쪽 방향에서 정면으로 불어온다. 왠지 하루의 느낌이 좋질 않다.
"아, 빌어먹을 바람."
시속 8km 정도로 기어가는 힘겨운 페달링이 이어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람 때문에 기온은 높이 올라가지 않고.
"에쉬, 몽골이냐!"
"아무래도 깔판이나 캠핑 의자를 하나 사야겠어."
공사 중으로 차량의 통행을 막아놓은 차로를 편하게 독차지하고 달리지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몽골에서처럼 바람이 부는 날에는 구름의 모양이나 움직임이 신기하다.
이제 멋진 구름의 하늘이 무섭다.
"그만해. 몽골에서 원없이 봤잖아."
쳐질 대로 쳐진 무거운 페달링이 계속 이어지고, 멀리 주변을 희뿌옇게 만드는 이상한 연기가 보인다.
"도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다행이지. 끔찍하네."
골재 공장으로 보이는 곳의 굴뚝과 주변에 쌓아놓은 골재의 흙더미에서 연기와 흙먼지가 콜라보를 하며 주변으로 흩날리고 있다.
골재 공장을 지나 도로변에 작은 마을이 나온다. 쉬데르티, 이곳을 지나면 주의 경계까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마을의 외곽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에는 식당이나 카페가 보이질 않는다.
"망했나?"
잠시 후, 구글맵에는 주유소만 검색되던 곳에 작은 식당이 함께 있다.
"죽으라는 법은 없네."
나를 지나쳐가며 손인사를 했던 바이크 커플의 오토바이가 보이고.
주유를 하던 러시아 친구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사진을 찍자고 한다.
주유를 하던 그에게 떨어져가던 버너의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주유기의 사용법을 물어보려 했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야, 잠깐만."
그러는 동안 두 대의 버스에서 중학생 또래의 학생들이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몰려든다. 자전거와 태극기를 보며 서로 무언가를 떠들며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은 짧은 영어를 하며 호기심의 눈빛으로 인사를 한다.
"정신 차리자, 한두 마디 받았다가는 여긴 지옥이 될 거야."
바쁜척하며 인사만을 건네고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외면하고, 지도 선생님의 외침에 아이들은 서둘러 버스로 돌아간다.
"살았다!"
연료통을 들고 주유소의 직원에게 휘발유를 살 수 있는지 물오본다. 연료통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팬'이라고 한다.
"아냐, 한국 거야."
주유를 하느라 바쁜 아저씨를 기다리며 주유기에 달린 95의 숫자를 가리킨다.
"퓨얼! 가솔린!"
한꺼번에 몰려든 차량들이 빠져나가고, 아저씨는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보이더니 주유소의 사무실을 가리킨다.
"오케이! 땡큐!"
휘발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옆의 식당으로 가니 아저씨는 사무실 방향을 가리키며 나를 부른다.
"배고파요. 밥부터 먹고."
햇볕에 놓아둔 자전거를 식당 옆의 그늘진 곳으로 옮기고.
파블로다르를 지나며 멋진 러시아의 클래식한 소형차가 잘 안 보인다. 그 대신 일본의 못생긴 도요타 차량들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일본 차량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물을 때 저팬이라고 먼저 묻는 것 같다.
들어선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카운터의 여자와 진지한 메뉴 고르기 토론을 한다.
"수프, 그냥 첫 번째 것으로 줘."
빵과 음료를 묻는 질문에 '카바스'라고 말하니 여직원이 피식 웃는다.
카운터에 올려진 닭다리를 하나 더 주문하고 자리를 잡는다.
"아무래도 카바스는 내 취향이 아닌가 봐."
월터가 쉴 새 없이 외치던 러시아의 국민음료 카바스는 달달한 느낌의 연한 한약 맛도 나고, 탄산이 섞여있는지 김빠진 느끼한 콜라 같기도 하다.
"뭔가 식단의 조합이 이상해."
소시지가 들어간 빵과 정체 모를 빵을 포장하고 닭다리 하나를 포장해서 식당을 나온다.
여전히 바람은 거세고, 바람이 없는 햇볕은 따갑기만 하다.
"얼마나 부는 거야? 23짜리 서풍이냐!"
40이 넘는 바람도 몽골에서 흔하게 맞아온 터라 23의 숫자가 커 보이지는 않지만 정면에서 불어오니 아주 죽을 맛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겨우 23km/h 가지고."
주유소 사무실로 들어가 물을 사고, 여직원에게 연료통을 보여주며 가솔린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조금 난감해 하더니 손가락으로 사고 싶은 휘발유의 양을 알려주니 방긋 웃으며 허락을 해준다.
밖으로 나와 아저씨를 보며 연료통을 흔드니 따라서 웃는다.
74텡게, 250원 정도로 연료통을 가득 채웠다.
"휘발유 가격 엄청 싸네. 카자흐스탄에도 석유가 나오는가?"
1리터에 500원 정도이니 우리나라의 1/3도 안 되는 가격이다.
주유기의 사진을 찍어 사무실로 들어가지 여직원이 재미있다는 듯 친절하게 웃으며 영수증을 보여준다.
"오호, 자동이네."
카자흐스탄에서는 주유를 하고 난 후 사무실에 들어가 결제를 하는 시스템인 모양이다. 동전 주머니를 털어 75텡게을 주니 5텡게를 되돌려준다.
"페이백인가? 스바시바."
휘발유를 채워 넣으니 괜히 마음이 편하고 든든하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이제 겨우 45km 왔네."
4시, 목적지까지 70km 정도가 더 남아있다. 평상시라면 무난한 거리지만 바람 속에서 목적지까지 갈 수 없을 것 같다.
"80? 100?"
바람 속에서 길마저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며 라이딩의 속도를 줄여놓는다.
도로 위에서 만나는 친절한 카자흐스탄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손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차량들마저 없다면 정말 지루하고 힘든 하루였을 것 같다.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변화 없는 초원의 풍경 속을 달리는 동안 천천히 하루가 저물어 간다.
"초원은 모두 똑같아."
아스타나로 가는 도로는 도로의 확장과 함께 인터체인지를 만드는 공사들이 계속된다. 파블로다르와 아스타나까지 동서를 가르는 도로에 주변의 도시나 마을을 잇는 도로를 만들어 가는 중인 것 같다.
7시 30분, 구글맵에 검색이 되지 않던 작은 마을이 도로변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일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지만 야영지를 찾으며 라이딩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마을로 들어가기엔 귀찮은 거리다. 인터체인지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캠핑을 할 장소와 주변에 식당이 있는지를 검색한다.
휴식을 위해 정차를 하는 한두 가족이 지나가고, 승용차에서 상의를 탈의한 남자와 함께 가족들이 내린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아스타나에 가고 있다는 남자는 너무나 유쾌한 사람이다.
여행에 대해 질문을 하더니 차에서 코냑을 가져와 따라준다.
향이 좋고 달콤한 맛이 아주 좋다.
남자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아내는 빵과 함께 먹을 것들을 챙겨 놓는다.
"카자흐스탄 돈은 있어?"
돈이 필요한지 묻는 남자에게 '노'를 외치며 사양을 하느라 고생을 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적은 금액의 돈을 주었지만, 돈이 필요한지 묻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생각은 없다.
유쾌한 남자는 못내 아쉬운지 탄산수 한 병을 더 꺼내어 건네주고 아스타나로 떠난다.
그리고 몇몇의 차량들이 더 지나가며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월터에게 메시지가 와 잠시 왓츠앱으로 대화를 나누고.
"여기서 캠핑을 할 거야. 새로운 켄셉이지. 어때?"
"나도 해봤어. 나쁘진 않은데 버스가 서지 않기를 바라."
8시 50분, 빠른 속도로 하늘이 붉게 변해가고, 약간의 코냑은 피로에 지친 몸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킨다.
"이건 뭐 갈수록 태산이네."
버스 정류장 뒤편 공간에 자리를 잡고.
식당에서 사온 빵과 닭다리로 저녁을 해결한다. 배가 고프진 않은데 여름 날씨라서 먹어치우는 것이 좋겠다 싶다.
달달한 코냑에 취한 것인지, 사람들의 정에 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졸음이 밀려와 이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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