헙드 광장에서 야기를 만나며 시작된 헙드에서의 시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4월 14일부터 시작된 몽골의 여행 동안 거센 바람을 맞으며 달려오느라 지쳐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시간의 여유가 넉넉하게 남아있는 몽골 여행에 대한 아쉬움인지 모르겠다.
출발을 위해 준비를 했지만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피곤함으로 게으름이 슬며시 찾아든다다. 90일의 비자 기간이 12일 정도의 여유밖에 남아있질 않다. 육로를 통해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하는 첫 번째 경험의 막연함이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오후 3시가 되어 출발을 해보려고 했지만 2,600미터의 고도를 넘어가야 하는 부담스러움이 찾아든다.
"30km만이라도 가 볼까 아니면 내일 아침에 빠르게 출발을 해 볼까?"
출발에 대한 정확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자전거에 패니어들을 장착했지만 비가 내린 후 며칠간 좋았던 날씨는 난데없이 신경질적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아니 왜? 자전거를 다시 타려고 하니까 바람이 부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다시 체크하고 준비하는 동안 4시가 가까워졌고, 배웅을 나온 유나 선생님과 부얀트걸의 도로를 걸으며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래, 내일 아침 편하게 출발하자!"
우체국에 들러야 하는 선생님은 택시를 타고, 나는 자전거를 체크하며 시내를 돌아 우체국에서 만나기로 한다. 무겁게 느껴지는 자전거지만 몸의 컨디션은 가볍게 느껴진다.
짐들을 다시 풀어놓고 마지막으로 고기를 사주겠다는 선생님을 따라 식당으로 걸어간다. 야기를 처음 만났던 헙드의 광장을 지나.
오묘한 구름들이 떠다니는 헙드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소와 양 그리고 닭고기가 섞여있는 메뉴로 식사를 한다. 유나 선생님이 생각했던 메뉴가 아닌 것 같고, 맛 또한 좋지는 않다. 음식의 조리법이나 고객 서비스에 대해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고기들은 포장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이제 헙드를 떠나게 된다.
유나 선생님의 배려 속에서 야기와 그의 가족들, 한미경 선생님, 함병규 선생님, 사롤, 빈데르, 체기, 바야나, 아무갈을 만나 즐거웠고, 루시아노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편안하고 좋았던 시간의 흐름이었다.
유나 선생님과 한미경 선생님의 안전교육을 위해 울란바토르로 떠났다. 교육 기간이 28일까지 연기되면서 헙드에서 머물러야 할 시간이 늘어나버린다. 300Km가 남아있는 국경까지의 거리가 부담스럽지 않지만 시간에 쫓기듯 국경을 넘고 싶지는 않다. 유나 선생님이 돌아오면 헙드를 떠나야 한다.
단전과 단수가 불규칙하게 지속된다. 인터넷이 끊기고 유나 선생님은 통신요금 납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유니텔 직원에게 요금납부에 관한 간단한 몽골어를 알려주었지만 기존 영수증의 납부번호를 제시하고 '히뜨웨?'만을 말하니 알아서 처리를 해주어 싱겁게 끝나버린다.
유나 선생님이 챙겨놓은 국과 카레가 떨어지고, 슈퍼에서 계란과 햄 그리고 참치캔을 사서 그럭저럭 식사를 해결한다. 자전거를 타지 않으니 딱히 많이 먹을 필요는 없다.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늘 생각뿐이다.
유나 선생님의 환경체험 행사에 대한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영상 자료를 편집하며 시간을 보낸다. 헙드 광장에서 팔던 양고기 꼬치를 사 먹기 위해 몇 차례 광장을 나갔지만 꼬치 아저씨는 영업을 하지 않았고, 어떤 행사를 준비하는지 광장의 중앙에 무대와 천막들이 설치되고 있다.
문화 행사 같은 것이 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군대관련 행사였던 모양이다. 3일 동안 저녁 시간이 되면 양꼬치구이와 행사를 보기 위해 광장에 나갔지만 모두 헛걸음이었다.
3일 동안 비가 계속 내렸고, 전기와 수도의 공급이 불규칙하게 끊긴다. 몽골 여행을 시작했던 위너님은 처이르를 지나 울란바토르에 가까워졌나 보다. 처이르를 지나 도로변의 숙소 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냈던 곳의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 날씨가 덥고 힘들었을 텐데 곧 울란바토르에 도착한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일주일 동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달력을 보며 언제 헙드를 떠날 것인지를 고민한다. 한 달 동안 숙식을 챙겨준 유나 선생님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길을 떠나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몽골의 체류 기간의 종료일이 다가오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30일, 01일?"
28일, 안전교육을 갔던 유나 선생님과 한미경 선생님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온 함병규 선생님이 돌아왔고, 유나 선생님이 울란바토르에서 공수해온 삼겹살로 오랜만에 고기맛을 본다.
한 달 동안 선생님의 집에 정신없이 늘여놓은 짐들을 정리한다.
헙드에 와서 야기에게 한국 사람이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야기는 함병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었다. 2년의 협력사업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간 선생님은 1년의 기간을 연장하며 휴가를 마치고 다시 헙드로 돌아온 것이다.
체육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 함병규 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에 인조 잔디를 설치하고 정비하려는 협력 사업을 위해 아침부터 사롤과 함께 회의를 한다. 외향적 성격으로 보이는 선생님은 유쾌하고 위트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함병규 선생님이 저녁을 초대해 주어 선생님의 집으로 간다. 책상과 화장실의 벽면에 중국어를 비롯한 한자와 단어들을 꼼꼼하게 붙여둔 것을 보아 그의 성격을 조금을 가늠해볼 수 있다. 선생님이 한국에 가지 않았었다면 함병규 선생님의 집에서 신세를 지지 않았을까 싶다.
여행을 하며 사람들과의 만남 과정을 생각해보면 우연의 연속들이 신기할 정도로 조합되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꼭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주어진 각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필연이나 운명 같은 감성코드로 의미를 부여하는 유치함 따위는 내게 없다.
그저 우연의 과정들 속에서 즐거움과 만족의 감정들을 느끼는 것을 보면 존재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삶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함병규 선생님의 한국에서 가져온 들깨가루를 넣어 미역국으로 저녁 식사를 차려준다. 썩 괜찮은 음식 솜씨다.
식사 후, 두 선생님과 함께 헙드불랑 근처의 약수터로 산책을 가려고 했지만 득달같이 달려는 드는 모기떼의 극성으로 산책을 포기한다. 여름철에 모기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무섭게 달려드는 모기떼가 놀랍다.
패니어의 짐들을 정리해 두고 마지막으로 부얀트걸을 산책하고 싶다고 말한다. 더위진 날씨 탓에 그늘이 없는 부얀트걸이 무더울 것이라 지레짐작했었는데 생각과 달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부얀트걸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여름에 이곳으로 나오는구나."
게르의 수도 많이 늘어나고 캠핑카 같은 낡은 트레일러도 한편에 놓여 있다.
게르들 사이로 몇몇의 텐트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니 헙드에서 시간을 보내며 부얀트걸에서 야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들도 보이고, 어른들과 아이들의 뒤섞여 물장구를 치며 깔깔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간의 편안함을 준다.
선생님과 함께 한국 식당에 들러 삼겹살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헙드의 수박을 맛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인지 선생님은 슈퍼에서 러시아산으로 보이는 수박을 한 통 사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