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1일 / 비 ・ 14도
롱지전-용척제전-룽성 각족 자치현
늦어진 아침, 9km에 위치한 계단식 논밭 용척제전을 보러갈 것인지를 수없이 망설인다. 짙은 안개비가 자욱한 룽지전. "가자!"
한 시간 늦잠으로 9시에 겨우 일어난다. 나처럼 게으른 여행자가 또 있을까 싶다.
비가 내리고 다음 목적지까지 90km의 거리, 지도에 보이는 경로가 구불구불 거린다.
"산길들인가?"
늦은 출발시간, 비와 안개, 숙소가 없는 산길 그리고 보고 싶은 용척제전의 풍경이 일정의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안개 때문에 용척제전에 가더라도 그 풍경들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일정대로 퉁다오 둥족 자치현으로 갈 생각이다.
짐들을 정리하고 체크인을 한 후, 다시 한번 망설임이 이어진다.
"그래도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잖아!"
고덕지도를 롱지에 위치한 용척고장채제전관경구(龙脊古壮寨梯田观景区)로 목적지 설정을 하고 출발한다.
롱지전의 용척제전으로 가는 길은 2개가 있다. 9km 거리의 용척고장채제전관경구와 17km 거리의 평안장족제전관경구(平安壮族梯田观景区).
10시 40분, 숙소에서 가까운 용척고장채으로 가기 위해 땡땡이 우위와 고무장갑을 착용한다.
"9km 산길, 딱 속초에서 넘어가는 미시령 사이즈네."
초입을 지나자 나지막이 시작된 오르막은 구비져 이어지며 조금씩 경사도를 더해간다.
천천히 밀려 내려오던 안개비가 짙어지더니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비밀스럽게 감춰버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거친 숨을 몰아쉴 때쯤 좁은 산길로 버스가 지나간다.
"버스, 버스가 있었어!"
숙소에서 아무리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던 대중교통 노선이었는데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미니버스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내 곁을 지나간다.
지나쳐간 버스는 안개가 감싸인 조용한 산길 어디선가 크락션을 울려댄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이라 그 소리가 어디서 울리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계속되는 산길 너머로 인가들이 조금씩 보이고 작은 산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안개가 걷힌다.
덥혀진 온몸의 열기에 우의의 단추들과 자켓의 지퍼가 내려지고 고무장갑은 벗어버린 채 핸들을 잡은 맨손은 전혀 춥지가 않다.
첫 번째 마주한 몇몇의 집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 4km가 더 남아있다.
어느새 안개구름들이 시선 아래 위치하고 산을 타고 넘는 안개구름의 변화무쌍한 흐름에 감탄이 절로 새어 나온다.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깝다. 사진으로 대신할게."
2km를 남기고 이전보다는 조금 편안한 길이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급격한 오르막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다시 짙어진 안개와 안개비가 축축하게 몸을 적시고 있다.
"그냥, 희뿌연 안갯속에서 사진으로 봤던 풍경을 마음속에 그리다 오는 것은 아닌지 몰라."
그렇게 1시간 20분 만에 도착한 용척고장채 입구, 자전거로 오르는 나를 보더니 모두들 환한 미소로 맞이해준다.
"빠쓰?"
100위안을 주니 잔돈과 입장권을 내주고 영어 팜플렛이라며 관광 안내서를 밝게 웃으며 건네준다.
"근데 얼마나 올라온 거야?"
산들샘을 켜고 고도를 확인하니 입구까지 670m 정도 높이다.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차장에서 잠시 쉬며 용척고장채의 관광 지도를 보고 있으니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밥을 먹을 것인지 묻는다.
마침 허기가 밀려와 가게 이름을 번역기에 메모하고 지도를 가리키며 가게의 위치를 물어보니 입구 가까운 곳을 가리킨다.
"응 알았어. 구경하고 밥 먹으러 갈게."
잠시 쉬고 싶은데 내 주변을 떠나지 않는 여자는 계속 무언가를 말한다.
"중국어 사투린가?"
말을 해도 전혀 의사소통이 안되고 할 수 없이 내가 쉬는 것을 포기한다.
"그래, 갑시다! 취! 취!"
입구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숙소들과 기념품 가게 그리고 단체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음식점이 나온다.
여기가 식당인지 묻자 여자는 안개에 감싸인 산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판티엔 나리? 멀어? 머냐고?"
알아들었는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너는 누구냐?"
헛웃음을 크게 지으니 저기를 보라며 손가락으로 전망대 같은 곳을 알려준다.
갑자기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계단식 논밭들이다.
"와우~!"
감탄을 자아내니 아주머니가 따라하며 예쁘냐고 물어본다.
"쩌리 쓰 피아오량! 피아오량!"
순식간에 나타난 풍경을 놓칠까 서둘러 핸드폰과 카메라를 꺼내어 바쁘게 셔터들을 눌러댄다.
경이로운 삶의 노력들이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 속에 어우러져 눈에 담기에도 아까울 지경이다.
사진을 찍는 사이 다 보았으면 가라는 듯 다시 안개가 빠르게 밀려든다.
다시 식당을 가기 위해 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오른다. 여자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없다.
용척고장채의 관광로는 나무테크로 예쁘게 이어지고 곳곳에 전망대처럼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빠르게 안개에 둘러싸이고 안개비가 시작된다.
산책을 하던 남성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사진을 찍자고 한다.
타이완에서 왔다며 소개하고 한국인이지 묻더니 엄지를 치켜세운다.
계속해서 산길을 올라가며 무엇이 즐거운지 여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 중얼거린다.
"근데 니 더 밍즈?"
윈웬밍이라고 말하는데 사용하는 중국어가 사투리인지 발음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그만이다.
가다 보니 논밭의 논두렁을 따라 가지런히 무언가가 세워져있다. 아마도 밤에 불을 밝히는 조명 같다.
용척제전의 야경을 보면 논두렁을 따라 조명을 켜둔 사진들이 있었다.
논밭 사이사이 흙계단이나 돌계단들이 정성스레 만들어져 있다.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을까?"
시골의 볼품없는 가랑이 논자락들, 삐뚤한 논두렁에 반듯반듯하게 돌들을 쌓아올리려 무던히도 애를 쓰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무엇이든 당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집스러웠지."
디자인 공부를 시작할 무렵, 반듯한 선 하나를 긋기 위해 밤을 새는 고집스러움에서 그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고작 1픽셀짜리 그레이 선 하나 때문에 말야."
20여 분,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산길을 오르고서 윈웬밍의 식당에 도착한다.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누구인지를 묻는 것 같다.
"다 왔어? 여기야? 쩌리 니더 판띠엔?"
질문에 맞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옆에 건물을 가리키며 잠자는데 42위안이라고 알려준다.
"알았어. 쭈띠엔 42카이. 일단 밥줘! 츠판, 워 헌어!"
식당은 예상외로 깔끔하고 우리의 일반 음식점처럼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괜찮다.
하지만 원재료를 보면서 주문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돼지고기를 골라 얼마냐고 물으니 아들처럼 보이는 주방장과 뭔가를 얘기하더니 50위안이라고 한다.
"뭐가 이렇게 비싸! 나 조금만 먹으면 돼."
소통불가, 밖에 나와 조리대에 붙어있는 돼지고기가 들어간 사진을 가리키며 얼마인지 물으니 30위안이라며 삶아 놓은 면을 보여주며 괜찮은지 물어본다.
"그래, 면 줘! 쓰, 쓰, 미엔"
어렵게 주문을 마치고 윈웬밍이 낑깡 같은 것을 따듯한 물과 함께 내어준다.
그리고 젊은 주방장은 고추와 방울토마토를 보여주며 넣을 건지 묻는다.
오는 동안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든 옷들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나온 음식은 퓨전 음식처럼 심플하고 맛과 향이 너무 좋다.
"와, 맛있는데 양이 부족하겠다."
순간 사라져 버린 맛있는 면요리. 맛있다 말하자 젊은 주방장이 좋아하고 잠시 후 들어온 윈웬밍도 맛이 어떤지 물어본다.
"하오, 하오 츠!"
점심을 먹고 윈웬밍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마을의 위쪽 가장 높은 전망대를 올라가기 위해 출발한다.
조금 오르자 길은 급경사로 이어져 자전거를 끌 수밖에 없다. 힘들게 자전거를 끌고 있으니 조금 전 인사한 윈웬밍이 뒤에서 따라온다.
자전거를 끌며 헉헉거리면 따라서 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핸들바를 끌어준다.
"근데 너 왜 나를 따라와?"
계속 길을 따라다니는 윈웬밍에게 물어본다.
"너는 길을 모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을 안내해 주려고 나를 따라온 것 같은데, 하나밖에 없는 산길에서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30여 분을 오르고 길은 한층 더 경사가 지고 노면은 나빠진다. 계속되는 안개비에 정상을 100미터쯤 남기고 포기한다.
"저기 가면 다시 이리로 내려와야 해?"
온갖 몸짓으로 물어보니 길이 없다고 한다.
"부쓰, 부쓰! 안되겠다. 아래로 가자. 취! 취!"
마을을 가리키며 내려가자고 하니 윈웬밍이 박장대소를 한다.
빗물에 젖은 급경사를 내려오는 것은 더 힘들다. 무거운 무게에 밀리는 브레이크를 잡느라 손아귀가 아파온다.
조심스레 천천히 경사면들을 내려와 다시 윈웬밍의 가게 앞에서 캘리퍼의 유격을 조정하여 브레이크를 정비하고 마지막으로 윈웬밍과 인사를 한다.
함께 사진을 찍고 가볍게 포옹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다.
"짜이 지엔. 윈웬밍! 시에 시에."
출발을 하려는 나에게 마지막까지 잠을 자라고 하는 윈웬밍을 뒤로하고 용척고장채를 떠나기 위해 출발한다.
잠시 안개가 걷히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 용척제전의 풍경들이다.
용척고장채의 첫 번째 전망대로 돌아오니 그동안 계속해서 마을 내에 울려 퍼지던 폭죽과 악기 소리는 장례식을 하는 것인가 보다.
전망대 바로 밑, 논밭의 최상단에 다른 묘들이 있던 곳에 붉은 천의 관과 마을 사람들이 보인다.
다시 안개가 밀려들어 마을을 감싼다. 마지막 풍경이 못내 아쉬워 셀카와 동영상을 찍고 계속해서 변하는 용척제전의 풍경을 잠시 바라본다.
"가는 걸음이 잘 안 떨어지네."
내려오는 길, 이곳을 오르며 안개 속에 숨어있어 보지 못했던 반대편의 마을과 논밭들이 살포시 그 모습을 보여준다.
든든해진 브레이크로 내리막을 내려오는 동안 순간순간 변하는 풍경들이 가는 길의 발목을 붙잡는다.
오전엔 보지 못하고 오르기만 했던 뾰족한 산봉우리들도 보이고, 구불구불한 이 길을 어떻게 올라왔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숙소가 있는 롱지전으로 되돌아오니 3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다. 오늘 라이딩을 할 수 있는 시간이 3시간 정도 남아있다.
"자, 이제 어디까지 가볼까."
우선 10km 거리의 룽성 각족 자치현으로 목적지를 잡고 바로 출발한다.
"어제 산길의 오르막으로 벌어 놓은 게 있으니 룽성현까지는 내리막길이겠지. 설마!"
룽성현까지는 생각대로 나지막한 내리막이 계속된다.
다른 현들에 비해 좁고 작게 느껴지는 룽성현에 도착하고, 은행에 들러 현금을 찾으니 4시가 되어간다.
30km 정도는 라이딩 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트립닷컴으로 숙소를 검색하여 근처 빈관을 선택한다.
"간만에 트립닷컴을 쓰네. 하지만 예약은 빈관에 가서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트립닷컴과 고덕지도를 써서 주점을 찾다 보니 요령이 붙었다. 어떤 곳은 온라인이 저렴하고, 어떤 곳은 직접 결제하는 것이 저렴하다.
그래서 일단 숙소를 검색해 찾아간 다음, 가격을 문의하고 1,700원 환율로 따져 저렴한 결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좁은 도로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소수족의 자치현이라 그런지 다른 도시들과는 분위가 약간은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 선택한 빈관을 가려다 도시 자체가 작다는 것을 깨닫고 도심의 외곽에 있는 평점이 좋았던 주점으로 방향을 바꾼다.
외곽이라 해봐야 1.5km 거리밖에 안된다.
숙소에 도착하니 프런트에 있는 여자 직원이 영어가 된다. 가격을 물으니 벽면에 표시된 가격표를 가리키며 149위안이라 한다.
트립닷컴에 수수료 포함 14,770원에 올려진 것보다 한참 비싸다.
"고뤠, 그렇다면 트립닷컴으로 온라인 결제!"
영어가 되니 편하다. 농담도 하고 여행에 대해 짧게 얘기도 하고, 롱지의 용척제전을 보고 왔다 말하니 자신의 고향이 롱지라며 논밭의 사진들을 보여준다.
깨끗하고 따듯한 숙소, 프런트 옆에 자전거를 놓아두려니 뒷바퀴가 바람이 살짝 빠져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저녁을 먹기 위해 나가면서 뒷바퀴에 바람을 채워 넣고 숙소의 옆에 붙어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벽면에 붙어있는 메뉴 사진을 가리키며 달라고 하니 식당의 여자는 사진을 나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
"..."
아마도 메뉴 사진이 아니고 인테리어 사진인가 보다.
그림을 확인하고 글자로만 쓰인 메뉴판에서 15위안 메뉴를 가리키며 알려준다. 친절하고 정이 많은 웃음을 갖은 사람처럼 보인다.
주문을 받은 뒤 뭔가를 물어보는데 번역기가 오번역을 계속한다. 여주인이 주방을 향해 뭔가를 달라는 제스처를 하는 사이 여주인의 발음을 따라 번역기에 말하니 '칠리'라는 단어가 뜬다.
"칠리? 쓰!"
맵게 해줄 것인지 묻는 질문으로 짐작하고 그렇게 해달라 말하니 주방에서 고추 하나를 들고 나와 보여준다.
"쓰, 쓰!"
흔쾌하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니 주방에 있던 직원들과 함께 크게 웃으며 한국인이 '어쩌구 저쩌구'라며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고추를 넣어주나 싶다.
잠시 후 나온 음식은 돼지고기 피망 볶음과 계란국. 음식이 담긴 그릇과 모양이 예쁘고 정갈하다.
대나무 그릇에 담겨 나온 음식은 우리네 음식과 거의 흡사하고 맛이 좋고, 중국에서 가끔 밥과 함께 주던 국물들은 모두 고수나 향신료 맛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이곳은 맑은 계란국이다.
중국집의 계란국 보다 단맛이 덜했지만 편하고 순한 국물이다.
한 그릇 정도 더 먹을까 싶다가 내일 아침에 혹시 문을 열면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식당을 나온다.
"하오 츠, 시에 시에!"
역시나 정감 가는 웃음으로 인사를 해준다.
중국의 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오다 보니 지역마다 사람들의 성향과 특색이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용척제전을 보기 위해 장가계로 향하는 80km를 포기하고 맞바꾼 하루지만 놀라웠고, 즐거웠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부족한 것은 다음에 채우면 돼."
Trak 정보
GPS 정보
"Great Thanks :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에릭스도자기, 찬숙, 이지, 혜영, 카일라스, 에릭누나, 달그림자, 불타, 파라, 뜨락, 고고싱, 부침이, 마이크로, 둥이, 장미, 일루, 앳찌, 짱돌, 울산 바이크하우스, 다빈치, 나도달인, 폴/해바라기, 걍바다, 유나, 김혜숙 산부인과, 일산쭈니, 소미에이, 고양을, 감사리, 파도, 방가/나리, 김윤구, 세콤염기섭, 최정현, 엘사
'Travelog > 중국(19.01.30~04.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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