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19일 / 맑음 ・ 12도
울란티그-불간
다시 온몸을 휘청이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온다.
저녁부터 시작되었던 바람은 낡은 친조리그의 집을 날려버릴 듯 거세게 몰아친다.
합판과 양철 조각을 덧댄 집에서 철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남자의 인기척, 그리고 한기가 스며드는 추위에 잠이 깬다.
새벽 2시, 밖으로 나가 침낭을 꺼내어 침낭 속으로 파고들어 잠이 든다.
남자의 휘파람 소리에 잠이 깨고, 피곤하게 일어나는 나를 보며 남자는 돈을 달라는 '머니머니'를 말하며 손으로 돈을 세는 시늉과 함께 가라는 제스처를 하며 휘파람을 분다.
"아, 칭기즈칸의 위대함을 자부하며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던 사람들이었을 텐데."
얼마의 금액을 달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무턱대고 돈을 달라는 남자가 한심하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몽골의 식당에서 잠을 자는 5,000투그릭을 줄 수도 있었지만 밥 한 끼의 값도 안되는 돈을 받고자 저러는 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남자의 표정을 보며 씁쓸하고 씁쓸하다. 큰돈을 줄 수도 없지만 약간의 사례를 한다 해도 기분이 개운할 것 같지 않다.
"돈 없어요!"
침낭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짐을 정리한다. 부부는 이내 문을 잠그고 양들이 있는 곳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다.
"냉수라도 한 그릇 주며 정이라도 베풀었으면 모를까."
어제와 똑같은 길 위에 거센 맞바람이 불어온다. 친조리그 부부의 불편함이 아니었다면 길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자. 30km라도 가 보자."
겨우 5km 남짓을 이동하는데 한 시간이 소요된다.
"끌고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며 작은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5~60km만 가 보자."
시간당 10km 정도의 이동이 계속되고.
페달링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오르막이지 내리막인지 알 수도 없는 길을 꾸역꾸역 이어가고.
어제 사두지 못했던 물조차 바닥을 드러내며 떨어져 간다.
"큰일이네. 물이 없는데!"
300ml, 하루 정도의 식수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야영을 하며 음식을 끓일 수 있을 만큼의 양은 안된다.
"어떻게 게르도 한 채가 안 보이냐!"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 물을 얻어야겠다 생각할 때쯤 고개를 땅에 박고 페달을 밟고 있는 내게 누군가 인사를 한다.
길 건너편에 승합차 한 대가 서있고,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서롱고스?"
자전거를 세우고 인사를 나눈다. 헙드로 가는 것을 알려주고 물이 있는지 바닥이 드러난 물통을 들어 보여준다.
차량으로 오라며 손짓을 하더니 큰 막걸리통을 꺼내어 물병 가득 담아준다. 그리고 작은 생수병을 가져오라며 제스처를 하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큰 물병에 물을 담아준다.
양털들을 수거해 판매를 하는지 승합차에는 양탈을 담은 포대들이 가득 차있다.
"바에르사, 감사합니다."
물을 가득 채워주고 남자는 인사를 하며 떠난다.
"이게 몽골 사람들의 인심이지."
"물 부자가 됐다!"
길은 여전히 반듯하고 하늘에는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지독한 맞바람은 계속된다.
"물도 생겼는데 양치나 해 볼까."
양치를 하며 기분을 바꿔봐도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고.
"야 이놈들아, 강풍기 꺼라!"
하루 종일 달리는데 구름 하나를 벗어나질 못한다.
50km를 이동하고 차량 한 대가 앞에서 정차를 한다. 양문을 열고 동시에 내린 두 명의 남자는 각자의 방향으로 소변을 본다.
"맞바람인데 그렇게 누면 신발에..."
소변을 보고 있는 남자들을 민망한 기분으로 손인사를 하며 지나치자 남자들이 나를 부르며 붙잡는다.
신발에 오줌을 잔뜩 묻힌 남자는 어디로 가는지 묻더니 자전거를 차에 싣고 가자며 제안을 한다.
감사의 인사를 하며 정중히 거절을 하고 헤어지려 해도 자전거를 붙잡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다.
"네루까지 70km야. 그리고 곧 비가 올 거야."
구름과 바람으로 보아 비나 눈이 온다고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유 없이 자전거를 싣고 갈 생각은 없다.
"그냥 갈게."
궂은 날씨에 마을조차 없는 곳을 달리는 여행자에 대한 우려 섞인 배려심인지, 아니면 다른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몇 번의 거절을 했음에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 남자의 행동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차라리 먹을 것이나 챙겨줘."
어렵게 남자들을 떼어내고 길을 이어간다.
저녁이 되며 바람은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이번에는 끝없는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여러 가지다. 딱 80km만 채운다."
짙은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눈과 비를 쏟아낼듯하지만 크게 걱정은 없다.
"난 이미 80km를 찍었거든."
주변에 게르는 보이질 않고, 가축들의 이동통로에 텐트를 칠 생각이다.
경사가 높아 도로 위의 시선에서 보이지 않고, 다리처럼 넓은 공간을 찾던 중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한다.
"빙고!"
동물의 사체도 없고, 이동 흔적도 적고, 근처에 게르나 가축들도 보이질 않고, 오토바이 자국은 흐릿하게 한 줄이 그려져 있다.
강수량이 적은 몽골에서 많은 비가 올 일도 없지만 비가 온다 해도 문제없다.
빠르게 텐트를 설치하고.
울리아스타이에서 사놓은 비상식들을 꺼내었다. 비비고 육개장, 햇반 컵반 순두부찌개.
물을 끓이고.
컵반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끝나는 줄 알았더니 라면처럼 끓이라고 한다.
우선 뜨거운 물을 덜어내어 커피를 타 놓고.
햇반을 넣고 끓인다.
순두부찌개를 먹는 동안 육개장을 끓이고.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순두부찌개에 라면을 넣고.
보글보글.
밥이 적어 조금 아쉬웠지만 그럭저럭 오랜만에 먹는 매운 국물에 만족.
"그나저나 해 안 지냐?"
9시가 훌쩍 넘었는데 너무나 환하다.
"넌 유니크 레어탬이다. 아껴둔다."
9시 50분, 서쪽 하늘에 붉은 석양이 떨어지고 하늘에는 멋진 구름이 떠있다.
그리고 여전히 밝다.
바람, 바람, 바람. 참 징그러운 몽골의 바람이다.
물을 채워준 남자 덕에 비상식을 맛있게 먹었으니 그것으로 좋은 하루다.
녹음된 라디오를 반복해 들으며 잠에 빠져든다.
"50km 정도만 가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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