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한 아침의 바닷가, 부모의 손을 이끌고 나온듯한 꼬마는 수영을 하고, 모래 장난을 하느라 바쁘다. 밥을 먹으러 가자는 부모의 제안은 그저 공허한 울림처럼 사라져 버린다.
아침을 먹을 생각으로 어제 만난 여행작가가 알려준 굿모닝 뷔페에 들렸지만 11시 반에 오픈을 한다고 한다.
텐트로 돌아오면 다른 식당에 들어갔지만 물회와 매운탕만이 가능하다 하여 그냥 돌아온다.
산산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멈추고 갑작스레 기온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늘로 이동할까."
귀찮은 일이지만 소나무가 있는 그늘로 텐트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몇 차례 왕복을 하며 텐트와 짐들을 옮기고 나니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기다렸어?"
텐트로 들어가 누워 있으니 한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어제 만났던 여행작가다.
"왜 전화가 안 돼요?"
어젯밤 비가 와서 걱정을 했다는 강작가님은 샤워를 했는지 물어본다. 폭우 속에서 비를 맞고, 더위에 땀을 흘리고서 마땅히 씻지를 못해 끕끕했던 차인데 샤워를 하러 가자고 한다.
작가님은 투숙하고 있는 펜션으로 앞장을 서고.
오전에 투숙객이 빠져나간 방의 샤워실을 안내해준다.
"아, 살 것 같다."
샤워를 끝내고 작가님을 찾았지만 보이질 않고, 아침을 먹으러 다시 굿모닝 뷔페로 간다.
한산한 뷔페식당, 6천원의 식대를 지불하고.
보리밥과 반찬들을 담는다. 고추장에 비벼먹어도 최고일 것 같은 나물 반찬들의 구성이지만 귀찮아서 그냥 배불리 두 그릇을 해치운다.
"집밥 같은 것이 먹고 싶었나?"
한국에 돌아와 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지만 특별한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화정산의 쌈밥집과 여행 중 먹었던 백반집에서 '정말 잘 먹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회나 고기, 족발 같은 즐겨 먹던 음식이 아니라 나물 반찬들과 함께 먹는 집밥 같은 음식이 먹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풀어 오른 배를 통통 튕기며 텐트로 돌아간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날씨지만 샤워를 한 상쾌함과 배부른 포만감이 그저 만족스러울 뿐이다.
텐트로 돌아가는 중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하니 도로의 반대편에서 강작가님이 손을 흔들고 있다.
"어디 갔다 와요?"
"굿모닝요!"
"아,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텐트에 탕수육이랑 만두를 놓고 왔어요. 먹어요."
"감사합니다."
작가님이 놓아둔 탕수육은 저녁으로 먹어야겠다.
텐트에 누워있으니 나른한 졸음이 밀려온다. 어느새 비는 멈추고 바닷가에는 아이들과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든다.
졸음도 털어낼 겸 바닷가로 나가서.
이리저리 걸어다닌다.
사람들과 아이들이 무언가를 잡느라 바쁘다.
"너냐?"
보말과 작은 조개가 많다며 신이 난 아이들.
갯바위 틈 사이로 게의 모습도 보이고.
'야, 다 보이거든!"
"심심한데 잡아볼까."
갯바위를 걸어가며 보말들을 채집하고.
"삶아서 먹으려면 다섯 신발은 잡아야겠네."
한 신발을 채우고 갯바위에 보말과 갯고둥을 풀어놓으니 움직임이 수상하다.
"이 건 보말인데."
"넌?"
빠르게 움직이는 보말 껍데기들, 잡은 보말의 1/3은 작은 소라게들이다.
녀석들과 한참 동안 장난을 치고, 모두 갯바위에 풀어준다.
라면에 넣고 끓여 먹을까 생각했지만 굳이.
"오, 왕 쪼리!"
텐트로 돌아와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먼바다에 비가 내리는지 구름의 움직임이 경이롭다.
"그럼, 발!"
"오늘 하늘은 수묵화네."
몽골의 구름에 비하면 뭔가 소박하지만.
"저기 비 내리네."
"제가... 깨진 컵 같아요. 남에게 상처를 주고, 이제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그런 존재 같아요."
여행 기간 동안 엉망이 돼버린 텐트를 정비하기 위해 백컨트리의 게시판에 AS 문의를 남긴다.
부러진 폴대들, 끊어져 버린 지퍼 손잡이와 불어진 지퍼. 총체적으로 난감 모드다.
"AS가 가능한가?"
여행을 떠나며 도도한 텐트와 침낭의 몸값에 놀라며 일명 가성비의 제품 중에서 나름 상급 제품들을 선택했고, 그런대로 제품들의 성능에 만족했다. 매일 계속된 캠핑과 좋지 못했던 날씨 탓에 하나둘 고장이 나고 성능들이 떨어져 갔다.
"만족스러웠으니까 수리해주세요."
커피와 함께 게으른 아침 시간을 보내고 어디로 향할지를 고민한다.
"동해, 삼척.. 정동진에서 쉴까?"
이틀 후부터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가 있고, 참게형의 도움으로 삼척에 있는 빈 아파트에서 쉴 수 있게 되었다.
안목해변을 벗어난 자전거 도로는 잠시 해안가을 벗어나고 작은 안인항을 시작으로 다시 해안가로 이어진다.
작은 해변을 갖은 어촌 마을에도 피서객들의 움직임이 바쁘다. 대부분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고, 작은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다.
편의시설이나 불필요한 유흥시설이 없는 작은 마을의 해안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한가롭고 즐겁지 않을까 싶다.
약간의 고개들을 넘는 동안 출출함이 밀려오고 정동진에 도착한다. 그 시절 누구나처럼 20대의 추억으로 남겨진 장소인데 기억 속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이 낯설기만 하다.
"푸른 거북이는 꿈이었던가?"
상실이나 망각이 아닌 다른, 유통기한이 다한 통조림 깡통의 숫자를 보고 있는 듯 이제는 무심하게 버려도 더는 아깝거나 아쉽지 않을 것 같은 그저 그런 무언가. 더는 나와 상관없는 공간의 낯설음이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안도현 -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배고프다."
주변을 검색하니 송혜교와 송중기가 먹었다는 순두부 짬뽕집이 있다. 맛집이어서 그들이 먹었다는 것인지, 그들이 먹었기 때문에 맛집이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칼칼한 순두부의 붉은 국물이 당긴다.
이른 점심시간이지만 식당은 제법 손님들로 가득하고, 그리 나쁘지 않은 음식이다. 든든하게 두 공기를 비우고 가게를 나선다.
정동진 해돋이 공원을 넘어가는 고개를 오른다.
"힘들다. 힘들어."
해맞이 공원을 넘어 들어선 심곡항,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심히 지나가는 해안도로에서 뜻하지 않게 멋진 풍경을 마주한다.
"어, 여기 예쁘다."
해안의 기암괴석들 사이 옥빛 바다 위로 심곡항의 붉은 등대가 페달을 멈추게 만든다.
"구름도 예쁘고."
중국의 리즈훼이에게 사진을 보내준다.
"예쁘지?"
장강이라는 큰 강이 있는 징저우시지만 바다를 보기 힘든 리즈훼이라 좋은 바다의 풍경을 보게 되면 생각이 난다.
동해가 가까워질수록 해안가의 풍경은 모래사장의 해변보다는 갯바위의 해안가로 변해간다.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갯바위의 너른 틈새에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이 많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모습들은 아니지만 나 또한 경우에 따라 그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테니 지나치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조금은 무료한 해안도로의 라이딩, 금진해변에서 잠시 쉬어간다.
모양 좋은 수영 슈트를 입고 서핑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로 6명의 젊은 사내아이들이 촌스러운 사각 트렁크를 차려입고 제자리 멀리뛰기를 하다 뒤로 멀리뛰기를 하면서 박장대소를 한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는 브로맨스지!"
차박 캠핑족이 많은 망상해변과 작은 해변들을 지나고 동해로 들어선다.
"딱히 부산으로 가는 것은 아닌데."
동해안의 여행코스 중 동해에서 삼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동해시를 지나쳐가는 코스의 지루함이 있다.
개인적으로 강릉 안목항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입도한 후 울릉도를 둘러보고 후포항으로 넘어가는 코스가 더 좋은 것 같다.
묵호항에 들어서고.
항구로 들어가 잠시 시간을 보낸다.
묵호항의 수산시장을 구경하지만 항상 뭔가 미안하고 부담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한국 시장을 구경하는 것이 힘들고 어색하다.
역시나 동해시를 지나가는 코스는 지루하고 힘들다.
"다시는 동해에 안 올 거야."
동해에 들어서면서 해안도로의 자전거 도로는 주차된 차량으로 점령된 상태가 된다.
추암해수욕장을 지나며 지나고 급경사가 나타난다.
"굳이 이렇게 까지 안내할 필요는 없는데."
속초와 강릉의 큰 해변에 비해 조금 자유스러워 보이는 해변이라 해안가에서 캠핑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추암해수욕장과 증산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동해와 삼척의 경계선을 지난다.
삼척시로 가기 위해 큰 언덕을 하나 더 오르고.
비치 조각공원을 넘어선다.
"바다, 언제나 그 바다. 상실의 기억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나를 위로해줘."
짠내가 물씬 풍겨오는 삼척항에 들어선다.
"한 마리도 팔까?"
반건조 오징어에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
"오늘은 왠지 회가 먹고 싶다."
미시령을 넘은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라이딩을 했는데도 피곤이 몰려온다.
"이상하게 힘드네."
시장으로 들어가.
"오징어 한 마리 만원, 세 마리 2만원.. 광어 35,000원!"
작은 삼척 회센터를 끝까지 구경하고 13호 집을 선택한다. 생각해 보니 13이라는 숫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광어회를 포장하고, 양념과 야채를 파는 가게로 가니 가격들이 너무 비싸다. 초고추장, 쌈장, 고추와 마늘, 쌈야채를 모두 사려면 횟값 정도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의 가격과 양이다.
"이거 하자인데."
초고추장과 소박한 깻잎만을 사 들고, 아파트로 가는 길에 하나로마트가 하나쯤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참게형의 아파트로 향한다.
삼척항과 삼척시 중심의 중간쯤에 위치한 참게형의 아파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망했어!"
오랜 기간 비어있던 집의 환기를 시키고 간단하게 청소한 후 샤워를 한다.
양이 많은 회를 초장만으로 먹으려니 뭔가 허전하다. 반쯤 남은 회는 라면에 넣어 끓여먹고 피곤함에 바로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