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85일 / 맑음 ・ 26도 양양 하조대-주문진-강릉 안목항 멀리까지 갈 필요도, 만나야 할 누군가도 없다. 그저 마음이 닿는 곳에 시간을 내려두면 되는 날들이다.
이동거리
41Km
누적거리
26,940Km
이동시간
4시간 0분
누적시간
2,042시간
동해안길
동해안길
25Km / 2시간 30분
16Km / 1시간 30분
하조대
주문진
안목항
571Km
꽤나 달콤하게 잠든 밤이다.
요란한 폭죽 소리도, 여행객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도 없는 조용한 밤이었다.
한적한 바닷가를 거닐고 시간을 보낸다. 요즘 들어 강우석이 진행하는 CBS의 클래식 방송이 좋다.
느긋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텐트를 말리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한다.
"남애항에 들러 물회로 점심을 먹고 안목항으로 갈까?"
울릉도로 가는 여객선이 있는 안목항은 자전거 여행을 하며 첫 번째로 야영을 했던 곳이다.
천천히 강릉을 향해 출발한다.
속초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이다.
평탄한 지형에 각기 다른 느낌의 해변들이 이어져 바다를 바라보며 라이딩하는 즐거움이 있다.
작은 해변의 소나무 숲에 캠핑용 텐트들이 자리 잡고 있다. 복분해변 솔밭 야영장, 소박한 해변이라 시즌이 끝나면 여행을 하며 캠핑을 하고 싶은 장소다.
"다음에는 이곳에서 캠핑을 해야겠다."
동해안의 해변에는 언제부터인지 서핑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파도가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해변이라 내가 보기엔 물놀이 수준이다. 파도가 없어서 인지, 초보자들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서핑보드를 서서 타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모두 배를 깔고 서핑보드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이다.
작은 해변들을 지나 남애항에 들어선다.
적당한 출출함이 찾아드는 시간이다.
등대횟집에 자전거를 멈추고.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이모님께 인사를 드리자 언제나 그렇듯 누구인지를 묻는다. 이번에도 윤기의 이름을 알려주고 인사를 드린다.
"물회 주세요."
회가 따로 나오는 물회에 면과 회를 넣고.
따듯한 밥 한 공기를 더 달라하여 마무리한다.
이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든든해진 배를 튕기며 강릉으로 향한다.
해안 철책선이 이어지는 솔밭길과 해안길을 달리고 시원한 풍경의 소돌해변을 마주한다.
해변의 끝자락 파도가 치는 넓은 갯바위에 발을 담그고 시간을 보낸다.
언제나 혼잡한 주문진시장을 지나고 다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차량들로 가득하다. 앞뒤로 밀려오는 차량들을 피해 가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해안가 방파제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사진 찍으려고 줄을 서 있는 거야? 뭔데?"
어딘가 친숙하고 낯이 익은 풍경의 방파제다.
"오, 도깨비!"
여행 중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가지고 다녔던 드라마 시리즈가 도깨비다. 수없이 반복해서 봐왔던 그 장소다.
리즈훼이에게 방파제의 사진을 보내주니 그녀도 장소를 알아본다.
드라마의 구도와 비슷하게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데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포기한다.
강릉으로 향한다.
주문진에서 강릉까지의 구간은 솔밭 해안들이 연이어지는 코스다.
솔밭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잔다.
한 시간 넘게 잠들었다 깨어나고.
강릉해변을 지나 안목해변으로 바로 이동한다.
속초해변만큼 좋은 강릉해변이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강릉해변보다는 조용한 송정해변이나 안목해변이 좋다.
약간은 후덥지근한 정오의 날씨 남자는 뜨거운 믹스 커스를 내어준다. 남자의 센스가 아쉽다.
건강상의 이유로 자전거를 타고 양구의 파라호 주변을 자주 라이딩한다는 남자는 광치령에 대해 물어보자 무거운 자전거를 타고 올라갈 수 없다며 미시령보다 광치령이 더 힘들다고 한다.
지도 앱으로 600미터가 안 되는 해발의 높이, 4km 정도의 거리인데 미시령보다 힘들다는 말이 선뜻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어디쯤이 정상이에요?"
"당연히 터널이 나오면 정상이지."
"그렇죠. 터널이 나오면 정상이죠."
몽골을 비롯하여 산을 넘는 도로에 터널이 없는 국가들을 여행하다 보니 한국의 수많은 터널에 대해 무감각해졌나 보다.
지하수를 끌어 쓴다는 주유소의 수돗물을 온몸에 끼얹으니 상의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소금기가 씻겨 내려간다.
"아, 시원해."
"가 봅시다. 혹시나 내가 광치령을 원킬로 올라가면 다음에 속초 라이딩이 있을 때 주유소에 들러서 그 남자가 광치령을 한 번에 올라갔다고 전해주세요."
무거운 자전거로 한 번에 올라갈 수 없다는 남자의 쓸데없는 투지를 불러일으킨다.
주유소를 출발하자 나지막한 경사로 시작된 오르막은 경사도를 더해가며 구불구불 이어진다.
속도가 나지 않는 페달링에 재희님은 멀찌감치 앞서가며 도로의 코너를 돌아갈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뒤따라 오는 나를 확인하고는 잠시 기다리며 광치령을 올라간다.
40여 분의 오르막이 끝나고 멀리 광치령의 정상인 터널이 보인다.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 무거워진 허벅지와 허리 그리고 꼬리뼈까지 욱신거리는 엉덩이의 통증이 조금씩 사그라든다.
"주유소 남자는 미시령을 안 가본 것이 확실해."
왼쪽 차선을 막고 내부 공사 중인 터널의 교통통제를 하는 작업자들이 신호가 있을 때까지 잠시 대기를 하라며 안내를 한다. 작업자의 신호에 따라 정차해 있던 4~5대의 차량들을 보내고 뒤따라 터널을 통과한다. 생각보다 긴 터널, 오르막을 오르느라 지쳐있던 터라 앞선 차량들이 터널을 모두 빠져나간 후로도 한참을 혼자서 터널을 내달려야만 했다.
멀리 터널을 빠져나간 재희님이 뒤를 돌아보면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내 내리막을 내려간다.
"아니 좀 쉬었다..."
터널을 빠져나와 갓길에 잠시 자전거를 세우려 하자 건너편 작업자가 빨리 지나가라는 제스처를 한다. 3~4대의 차량이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 서둘러 통제구간을 빠져나간다.
"당신들 때문에 차들이 기다리잖아요!"
정차되어 있는 차량들을 지나칠 때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는 작업자의 소리가 들려온다. 작업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네네. 수고하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터널 공사로 인해 차량들이 정차를 하고 있는 것이고, 나로 인해 1~2분의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이다. 자전거가 터널에 진입했다는 것도, 자전거가 차량보다 느리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너무나 터무니없는 짜증이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하여 수많은 도로 공사 구간을 지나쳤지만 누구 하나 불편한 기색을 표하지 않았다. 수십 미터가 정체되어 있는 현장에서도 덜컹거리는 노면의 느린 자전거 속도에 맞춰 뒤따라 오고, 안전하게 자전거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모습들이었다.
자전거로 인해 잠시 지체된 차량들의 운전자들은 조금 불편하겠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1~2분의 시간이 그렇게도 불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쓸데없이 여기까지 올라왔네' 생각하며 웃어주면 그만인 일일 텐데 말이다.
신경질적인 작업자에게 짜증 섞인 말대꾸 대신 성의 없는 인사로 싱긋 웃어주며 시원한 내리막을 달려 내려간다. 주유소 남자의 말처럼 12km 정도의 긴 내리막과 평지길은 원통까지 이어진다.
시원한 풍경의 북천을 따라 원통을 지나치고 미시령과 한계령이 갈라지는 한계 교차로를 향해서 간다.
"조금 쉬어요. 배고프다."
잠시 그늘에 앉아 미시령을 오르기 전 허기를 채울 식당을 찾는다.
"시원한 냉면이 먹고 싶다."
원통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은 라이딩 시간이 느려지면서 식사 타임을 놓치고, 북천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 주변에는 식당이 없다.
"왜 식당들은 죄다 반대편에만 있는 거야."
한계 교차로의 내설악 휴게소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출발을 한다. 하지만 이내 설악휴게소가 나타나자 자연스럽게 휴게소로 들어간다.
너무나 한산한 휴게소의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살펴보던 중 도토리묵사발이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많이 주세요. 시원하게요!"
밥을 먹으며 재희님이 돌아갈 속초-춘천 간 고속버스의 시간을 알아보니 마지막 고속버스의 출발 시간이 8시 반이다.
"지금이 4시 반, 미시령 입구까지 20km 정도고 미시령에서 속초까지 20km. 빨리 가도 4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가도 8시 반의 막차는 탈 수 없을 것 같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가자 로드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얼마나 여행을 하셨어요?"
"집 나온 지 한 500일 됐어요."
"그럼, 미시령으로 가 볼까요."
용대리로 가는 미시령 옛길은 속초구간 중 가장 좋아하는 코스이다.
북천을 따라 이어지는 고원통 계곡의 시원한 물줄기와 조용하고 아늑한 옛길의 정취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당일치기로 속초 라이딩을 함께 한 재희님을 위해서는 몇 분이라도 빨리 속초에 도착해야 하지만 예상되는 시간은 자꾸만 뒤로 멀어지고 있다.
그에 비해 옛길이 끝나고 미시령 초입까지 이어지는 용대리의 46번 국도는 최악으로 끔찍한 코스다.
대부분 맞바람이 불어오는 지루한 국도변의 라이딩은 무거워진 페달을 더욱 무겁게 만들어 버린다. 느린 속도에 맞춰 뒤따라 오던 재희님은 졸리다고 한다.
"죽을힘을 다해 가고 있는데 졸리다뇨?"
최대한 로드바이크의 속도를 줄이지 않게 하려 페달을 밟아가는 나에게도, 하루 종일 느린 자전거에 맞춰 라이딩을 하는 재희님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동행이다.
"세상 일이 다 그래. 누군가의 속도에 맞춰 함께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너와 나도 그랬겠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의 크기보다 속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6시 40분. 지루한 용대리의 도로가 끝나고 미시령 옛길의 초입에 도착한다.
"아,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야."
수돗물을 온몸에 끼얹고 잠시 쉬어간다.
"출발하면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정상까지 쭉 올라가세요. 천천히 따라 갈게요."
여행용 자전거를 끌고 미시령을 넘었던 재작년의 일기를 찾아보니 미시령 정상까지 40여 분이 걸린 것 같다.
20여 분의 휴식을 끝내고 미시령을 오른다. 재희님은 출발과 함께 댄싱을 치며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부럽다."
지난 일기에는 정상 1Km를 알리는 이정표에서 자전거를 내렸다고 적혀있다.
"정상 1Km 지점까지만 소처럼 가 보자."
무거워진 느린 페달링으로 1km 이정표를 지나고 2~300미터쯤 더 지났을 때 자전거에서 내린다.
"왜 항상 미시령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만 넘는 거야."
10미터쯤 자전거를 끌고 가다 끄는 것이 더 힘들어 다시 안장에 오른다.
"아주 몇 번 더 오면 원킬하겠어. 그냥!"
새로 정비가 된 미시령의 정상에 재희님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고, 지난번과 비슷하게 40여 분이 지나서 정상에 도착한다.
"이번에도 일몰이네."
잠시 석양을 바라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이 산등성이 너머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야! 기다려."
"에쒸!"
휴게소가 있던 자리는 전망대로 새롭게 정비가 되어있다.
반대편과 달리 속초 방향의 하늘에는 은은한 파스텔톤의 석양이 내려앉아 있다.
"좋네."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속초를 향해 내려간다.
"무조건 안전하게 조심해서 내려가요."
디스크 브레이크가 장착된 여행용 자전거지만 여행용 자전거의 브레이크는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무거운 무게 때문에 브레이크 패드나 슈가 빨리 마모되는 탓에 교체 시기를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고, 내리막 도로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무게 때문에 브레이킹이 생각처럼 안 될 때도 있다.
또한 급회전 시 패니어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고, 피로 데미지가 누적된 렉이나 스포크는 언제든 부러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브레이킹을 해가며 제어 가능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시원한 내리막을 달려 울산바위 휴게소에 도착하자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후미등과 라이트를 장착하고 속초해변을 향해서 이동한다.
8시 40분. 목적지였던 속초해변에 도착한다. 해변의 입구에는 코로나 방역을 위한 소독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담당자들이 출입통제를 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도 돼요?"
"텐트 치시려고요?"
"아니요. 사진만 찍으려고요."
버프를 올려 쓰고 잠시 해변 입구로 들어간다.
"왔다!"
주변 편의점에 들러 커피와 맥주로 속초 입성을 자축한다.
"근데 재희님, 버스가 없어서 어떻게 해요?"
재희님은 근처의 카페나 해변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가겠다고 한다. 아무리 로드바이크를 타고 왔지만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온 지친 몸으로 밤을 새운다는 것이 좋지 않은 생각 같다.
"저는 너무 힘들어서 숙소를 잡고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재희님도 그렇게 하시죠?"
속초 해변에는 국민여가 캠핑장이 지정되어 있지만 방역관리를 하고 있는 해변의 야영장에서 캠핑을 할 수 없을 것 같고, 광치령과 미시령을 넘어 100km 넘게 달려온 터라 야영보다는 편하게 쉬어야 할 것 같다.
"여기 리조텔 같은 것이 있는데 저렴해요. 더블룸이나 큰 방을 잡아서 같이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방 두 개를 잡던지요."
재희님은 자신은 카페 같은 곳에서 보내면 된다며 숙소를 잡고 쉬라고 한다.
지난번 여행처럼 해변의 리조텔 입구에는 중년의 여성들이 호객을 하고 있다.
"얼마예요?"
"두 명에 5만원요."
"혼자 잘 건데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중년의 여자와 35,000원에 숙박비를 협상하고 넓은 리조트 방에 자전거를 넣어둔다.
9시가 넘으면 음식점들의 영업이 끝나는 속초해변, 지난번에도 실패한 생선구이집은 이번에도 문이 닫혀있고 아바이 순댓국집도 영업이 끝났다고 한다. 재희님과 투다리, 옛날통닭집에서 반주와 함께 저녁을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정말 괜찮겠어요?"
한두 차례 상대방의 의견을 물어본 후 타인의 의사에 관여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이지만 쌀쌀한 바닷가에서 밤을 새운다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어 다시 한번 물어본다.